한라산 자락이 푸름을 과시한다. 봄과 여름이 오고 가는 징검다리 유월에 온갖 상념들을 버리고 잠시 사유에 뼛속까지 빠질 때가 있다.
그때 예전 일처럼 잠시 머물 수 있으련만, 계절은 강물 흐르듯 어느새 봄은 내 곁을 스쳐 지나갔다.
만물이 번창하는 여름의 초입에 들어선 것이다.
밤새 는개는 아침 이슬로 초록 잎사귀에 청록의 구술처럼 굴러 떨어질 것 같다만, 천 년을 터득해온 습성으로 아침 햇살이 빛이 발할 때까지 착상해 있는 모습이 꽃보다 아름답다.
필자는 희붐한 시간에 목가적인 옛 농가 길을 걷고 싶은 마음에 풋풋하고 청량한 공기를 마시며 밭담 사잇길을 시나브로 걷다 보면 콤바인이 보리타작에 바삐 돌아간다. 뒤따라 참새 떼 들이 주위를 살피며 떨어져 나온 알곡을 주워 먹고 여치도 이리 뛰고 저리 뛰는 꼴이 생사를 건 전장에 초병 같기도 하여 입가에 미소가 절로 번진다.
우리에 삶도 그와 같으리, 밭담 사이사이 인동꽃과 찔레꽃이 수줍게 널브러지게 새 아침을 열고 있다.
이때 즘이면 뻐꾸기가 애답게 우는 소리가 밭담 넘어 숲에서 누군가 애타게 부르는 것 같아 눈빛이 자주 가지만, 눈뜬 봉사처럼 뻐꾸기 찾는 일은 예삿일이 아니다.
필자의 유년기에 주인 몰래 청보리 따다가 모닥불에 구워 먹다 보면 내가 네가 아닌 듯 친구끼리 마주 보며 킥킥 웃곤 했다. 그 웃음이 가녀린 찔레꽃 웃음 같기도 하다.
보리를 거두어들인 뒤 빈 밭에서 이삭을 주워, 솥뚜껑에 볶아 개역(미숫가루)을 만들어 시원한 물에 타 먹으면 무더운 여름이 그냥 지나가는 듯했다.
그때 그 시절엔 보리 볶은 알곡을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군것질로 즐겨 먹기도 했다.
지금은 오일장 난전, 혹은 길거리에 옥수수 뻥튀긴 것으로 군것질을 하기도 하고, 맥주 안주로 으레 나오기도 한다.
그 옛날 보리 탈곡은 보릿대를 손아귀에 잡힐 만큼 개켜서(여성의 몫) 넘겨주면, 힘센 남정네는 홀대에 넣어 힘껏 당기면 보리 모개가 보릿대에서 떨어져 나온다.
이 작업은 불볕더위에 비 오듯 땀이 흘러내리고 힘에 부쳐 잠시 쉬고 있을 때, 아이스케이크(아이스 케기)를 철 가방네 넣고 파는 얘가 지나가며 아이스 케기! 아이스 케기! 외치면 얼른 불러세워 사서 먹으면 피로가 확 풀리기도 했다.
이때다 싶을 때 자리 장사가 지게에 질머지고 자리 삽 서! 자리삽 서! 외치면 보리 한 됫박에 바꾸어 사 놓기도 했다. 시제 말로 물물 교환이었다. 그리고 스님이 누덕이 옷을 걸치고 목탁을 두드리며 보시를 요구하기도 하면 속박으로 바랑에 넣어 주면, "나무아미타불" 연신 염불하며 머리를 까듯이 숙이고 간다.
보리 모개는 탈곡기에 돌리고 알곡을 거두어들이면, 멍석에 며칠을 유월의 햇살에 말려 일 년 먹을 알곡이 된다.
탈곡하고 난 보릿대는 눌을 눌었다가 밥을 짓는 연료로 사용했다. 그리고 보릿대 길고 굳은 것을 골라 모자(밀랑퍼랭이)를 만들면 여름 한 철 뙤약볕을 이겨 낼 수 있었다.
보리 깍지는 겨울철 온 방용으로 (굴묵) 요긴하게 사용 되었다. 보리작물은 하나도 버릴 게 없는 그 시절에 보리작물은 특작물이었다.
필자는 오늘도 아침 녘 오라동 농로 길을 걷기 운동을 하면서 그 향수에 빠져 오도 가도 못하는 것 같은데, 보리밭길에서 멀어져가는 발길에 맞추어 보리피리 불며, 꿈속을 걷는 듯했는데, 집에 들어서니 햇살은 햇보리처럼 무르익어 있듯 중천에 와 있었다.
최창일 시인/제주세계자연유산 해설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