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주의 혼’, ‘폭풍의 화가’, 세계 화단의 거목인 변시지 화백이 8일 오후 서울 고대 안암병원에서 별세했다. 향년 87세.
서귀포시 출생의 화백은 5살 때 부친 손을 잡고 일본 오사카로 건너갔다.
미술에 입문한 그는 일본 최고권위의 광풍회전과 일전에 입선해 데뷔 후 22살엔 광풍회전에서 최연소기록으로 최고상을 수상하면서 천재성을 인정받았다.
청년기를 일본에서 보내면서 화려한 명성기를 맞을 수도 있었지만 1957년 서울대의 초청을 받아 고국으로 영구 귀국했다. 그는 서울에서 이른바 ‘비원파’로 활동하면서 ‘창덕국의 비원풍경’, ‘자화상’ 등의 작품을 남긴다.
그도 잠시. 그는 당시 국내 화단의 폐단에 염증에 느낀다. 해서 1975년 고향인 제주에 정착한다. 물론 제주대에서 후학을 양성해달라는 부탁도 계기가 됐다. ‘예술의 모체는 풍토’라고 믿던 그는 ‘가장 제주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는 생각에 미련없이 서울생활을 접었다.
"예술은 풍토에서 나오는 겁니다. 파블로 피카소는 프랑스에서 활동했지만, 스페인 사람이기 때문에 작품에서 정열이 나오잖아요”. 그의 ‘풍토론’이다.
그는 “풍토가 예술의 모태가 된다면 지역마다 사투리가 있듯이 지역마다 다른 그림이 나올 텐데 요새는 지방 작가들도 서울 작가와 작품이 같고 독창적인 작품이 안 나오는 것 같아요. 제주는 외로운 섬이에요. 그래서 쓸쓸하고 외로운 그림이 나오게 되는 거죠"라고 했다.
고향에 몸과 마음을 푼 그의 화풍은 ‘제주화’로 명명된다. 그의 작품에는 제주인의 삶과 서정이 그대로 녹아들기 시작한다. ‘돌’, ‘바람’, ‘여자’, ‘가뭄’이 많은 ‘4다(四多)’의 자연과 풍물이 농익은 붓끝으로 살아났다.
누런 바탕의 화면에 휜 나무와 까마귀, 그리고 조랑말, 배, 그리고 자신의 분신과 같은 구부정한 한 사내. 귀향을 결심하고 도착한 그에게 제주의 색깔은 황토색, 그것이었다. 제주의 태양빛이 강렬하다 못해 모든 사물을 누런색으로 보이게 했기 때문이다.
제주 귀향 초기인 1970~80년대 작품에 대한 평가는 엇갈렸다. 전시회를 찾은 일부 평론가들로부터 “신선하다”는 얘기도 들었지만 “이해하기 어렵다”며 외면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80을 훌쩍 넘어 90을 바라보면서 그의 예술세계는 세계로부터 인정받고 있다. 대중들에게도 훨씬 친근하게 다가섰다. 그의 그림에서 외로움, 쓸쓸함, 그리움이라는 가장 인간적인 정서가 묻어나기 때문이다.
‘폭풍의 화가’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바다가 보이는 유택(幽宅)에서 ‘제주의 혼’으로 남는다.
유족은 부인 이학숙 여사와 아들 정훈씨, 딸 정은.정선씨가 있다.
고인의 유해는 오는 10일 제주로 운구된다. 빈소는 서귀포시내 한빛장례식장에 마련되며, 12일 서귀포시 하원동의 가족묘지에 안장될 예정이다. <박수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