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문제연구소는 “이승만, 정규 학력 없이 대학 진학 5년 5개월 만에 박사학위는 의문‘이라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최근 불거진 이승만을 다룬 다큐멘터리 <백년전쟁>에 대해 ”다큐 내용이 조작됐다“는 보수진영의 주장에 대한 반박문 내용이다.
특히 민족문제연구소는 유영익 한동대 석좌교수조차도 대학교 학부 성적이 뛰어나지 못했던 이승만이 어떻게 하버드와 프린스턴 대학권에 진학할 수 있었는지 긍금하다고, 했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이승만은 과연 누구인가? 김수영 시인이 '살인자'라고 읊조린 이승만이 동포들의 마음에서 1인자가 될 수는 더더욱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이승만은 사이비 교주 인가? 애국자인가? 기회주의자인가? 이 나라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국부(國父)인가? 민족분열의 원흉인가? 폭력배인가? '이승만' 그는 과연 어떤 인물인가? 그래서 시인은 1960년 4월 26일 이른 아침에 '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는 시를 썼다.
‘우선 그 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 그 지긋지긋한 놈의 사진을 떼어서/ 조용히 개굴창에 넣고/ 썩어진 어제와 결별하자/ 그 놈의 동상이 선 곳에는/ 민주주의의 첫 기둥을 세우고/ 쓰러진 성스러운 학생들의 웅장한/ 기념탑을 세우자/ 아아 어서어서 썩어빠진 어제와 결별하자// 이제야말로 아무 두려움 없이/ 그 놈의 사진을 태워도 좋다/ 협잡과 아부와 무수한 악독의 상징인/ 지긋지긋한 그 놈의 미소하는 사진을/(……)/ 선량한 백성들이 하늘같이 모시고/ 아침저녁으로 우러러보던 그 사진은/ 사실은 억압과 폭정의 방패였느니/썩은 놈의 사진이었느니/ 아아 살인자의 사진이었느니/ (……)’
전국의 시민과 학생들이 '이승만 하야와 독재 정권 타도'를 외치며 혁명적 투쟁으로 발전시켜나가자, 이승만은 사퇴 성명서를 발표하고 경무대를 나와 이화장으로 가는 날 아침, 시인 김수영은 혁명의 감동을 읊조린 것이다.
그리고 이승만은 제주4·3 당시 국무회의에서 강경진압작전을 지시했다. 그래서 정부에서 발간한 ‘제주4·3사건진상보고서’에도 초토화의 책임은 당시 정부와 주한미군사고문단에게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 당시 이승만은 대통령으로서 통수권자이며, 미군은 한국의 작전통제권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이승만의 다음 발언은 강경진압작전이 미국과의 교감 속에서 벌어졌음을 암시하고 있다. “가혹한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제주4·3사건을 완전히 진압해야 한국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는 미국의 원조를 받아낼 수 있다.”
이승만은 제주 4·3 당시 불법계엄령을 선포하고, 1949년 1월 국무회의에서 “미국측에서 한국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많은 동정을 표하나 제주도, 전남사건의 여파를 완전히 발근색원하여야 그들의 원조는 적극화할 것이며 지방 토색 반도 및 절도 등 악당을 가혹한 방법으로 탄압하여 법의 존엄을 표시할 것이 요청된다”고 발언하였다.
특히 이승만은 입산자 대부분이 ‘공산당 선전에 속거나 집이 불에 타 갈 곳이 없어 도로 올라간 자’임에도 이들을 ‘폭도’라 하여 무차별 총살했던 것이었다.
해방정국에서 이승만이 내세운 최대 이슈는 ‘반공’이었다. 당시 국회를 통과한 국가보안법도 바로 이런 분위기에서 탄생했다. 특히 제주4·3 당시 악명 높은 서북청년회를 동원한 사실도 짚고 넘어가야 할 사항이다.
그렇다년 제주4·3 당시 군·경을 장악한 당사자는 누구인가? 물론 이승만과 미국이 장악하고 있었고, 그들의 승인 없이는 군사이동도 불가능했다. 당연히 제주4·3은 이승만과 미국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
김관후/시인·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