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는 조상의 명예를 드높여 가문을 빛낼 수 있는 유일한 기록이다. 우리조상들은 족보를 신성시하는 것을 양반의 후손임을 증명하는 양반증명서 쯤으로 여기며 살아왔다. 풍수설에 따라 조상의 무덤을 써야 자손이 번성한다는 속설이 오랜 역사의 흐름에도 쉽게 변하지 않는 것과 같이 족보와 조상의 묘는 그 맥락을 같이해 오고 있는 것이다.
조상의 묘를 명당에 쓰고 족보에 죽은 조상의 지위를 높여 등재하는 것을 자손들에게 주어진 사명쯤으로 알고 살아온 것을 우리는 부인하지 못한다. 그 결과가 살아생전에 무지렁이 농투성이 조상도 죽으면 지위가 부여되어 족보에 등재된다. 이것이 곧 자손들이 애쓴 보람이다.
족보미화 관습은 단순히 가문의 전통이나 기록의 한계를 넘어 사회적으로도 적지 않는 영향력을 행사한다. 지금도 전통을 미화하고 계승해야 된다는 논리로 족보를 중시하는 풍조가 팽배해 있음은 물론이고 족보에 죽은 조상의 지위를 격상하여 명망 있는 계파에 연계시키려고 애쓰는 자손들이 있음이다.
조상미화관습은 살아 있는 후손들의 이기적 소산으로 족보에 허구가 삽입되는 과정을 거친다. 이 허구의 기록이 삽입된 족보는 가문의 전통으로 대물림하면서 진실로 포장된다. 족보의 허구성을 알면서도 그 사실을 적시(摘示)하지 못하여 안타까움을 토로하는 자손도 있기는 하지만 조상의 명예와 가문의 전통이라는 이기에 압도되어 스스로 표현을 자제하기 마련이다.
가문의 명예를 위하여 자손들이 애쓴 결과가 족보마다 왕족은 물론이고 정승판서나 통정대부이상의 당상관반열에 이른 벼슬을 쉽게 대할 수 있다. 사실을 입증할 근거는 찾을 길 없으나 조상을 높은 벼슬아치로 치장한 족보가 가문의 유일한 기록으로 대를 이어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족보의 허구성에 대하여 일부 학자들은 족보의 기록처럼 허구가 진실을 잠식하는 전통은 하루 빨리 버려져야 한다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 당장 버리지는 못할망정 더 이상 허구를 미화하는 일은 자제해야 된다는 논리도 만만치 않다.
허구로 미화된 족보는 봉건적 성벌제도(姓閥制度)의 잔재로 백골록(白骨錄)에 불과하다는 이론을 전개하는 학자도 있다. 어느 학자는 전통문화의 계승을 명분으로 죽은 조상을 미화한 족보는 가문의 명예가 아닌 슬픈 기록일 따름이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족보의 허구성에 대하여 좋은 예가 있다. 해방초기에 서울대학교총장을 지낸 분의 조상이 노비신분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분은 자신이 천민의 자손임을 숨기려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분이 세상을 뜬 뒤에 전기를 출판하면서 그분을 양반의 후손으로 족보에 등재했다. 자손들이 같은 성씨의 어느 문중의 족보에 연결시키려고 무진 애를 쓴 결과인 것이다. 이것이 허구가 진실로 둔갑한 예다.
조선시대 우리나라 인구의 신분별 분포상황에 대하여는 확실한 통계는 없으나 농업에 종사하는 상민(常民)이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당시 노비의 비중도 전체 인구의 20%가 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현재의 인구 대부분이 상민이나 노비의 자손인 셈이다. 그런데도 성씨마다 족보가 있고 족보마다 양반의 후손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는 대부분의 족보가 진실과는 괴리된 부분이 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족보를 자신의 사회적 지위와 연계시켜 중요시하는 것은 왕조시대에나 있었던 양반후손들의 귀족 지향적 심리의 산물이라는 말을 설득력 있게 받아드리는 측면도 없지 않다.
조선후기에 사회적으로 천시 받던 천민집안에서는 조상을 위하는 마음은 있어도 굳이 족보를 원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 이유는 천민임을 숨기고 양반으로 위장해야 하는 비도덕적 행위를 자행하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는 말이 전해지기도 한다.
이제 호주제가 폐지될 모양이다. 철저한 부계위주의 상징적 기록인 족보에도 변화가 있어야 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보는 것은 기우(杞憂)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