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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라이 정신 만세’, ‘사무라이 투혼은 건재하다’. 2010년 7월, 일본 축구가 남아공 월드컵에서 16강에 오를 때였다. 일본 언론매체들의 헤드라인은 온통 ‘사무라이’ 였다. 2006년 월드컵 때도 일본의 슬로건은 ‘사무라이 정신을 발휘하자’였다.
그렇다면 기회 있을 때마다 금과옥조(金科玉條)로 내세우는 ‘사무라이 정신’은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그들은 ‘명예와 자존심’으로 덧칠하고 있다. ‘명예로운 죽음’과 ‘화끈한 자존심’으로 미화하는 ‘죽음의 문화’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그러나 그들이 동의하든 안하든 ‘사무라이’는 ‘칼잡이 싸움꾼’일 뿐이다. 권력과 부에 기생하며 싸움질로 밥 빌어먹고 살았던 칼잡이가 ‘사무라이’ 본질이다. ‘전쟁지향의 폭력 집단’이라고 내려찍는 평가도 없지 않다.
‘사무라이’가 일본과 일본인에게는 ‘명예의 화신(化身)’처럼 숭배의 대상일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 의해 자행됐던 ‘역사적 살육(殺戮)’을 떠올리는 문명사회의 인식은 ‘악귀(惡鬼)의 화신’으로 설명될 수밖에 없을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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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일본군에 의한 남경(南京) 대학살은 인류역사상 가장 악랄하고 잔인했던 ‘살육의 역사기록’이다. 그들은 스포츠처럼 살육을 즐겼다.
공놀이 하듯이 어린아이를 공중으로 던졌다. 내려오는 몸뚱이를 총검으로 꿰어 흔들며 킬킬 거렸다. 임산부의 배를 갈라 해체하면서 희희낙락했다. 두 달 남짓 이렇게 희생된 중국인들이 13만명에 달했다. 역사는 그렇게 기록했다. 이러한 잔학을 명예 중시의 ‘사무라이 정신’으로 자랑할 수 있을 것인가.
일본과 일본인을 이야기 할 때 인지부조화(認知不調和) 현상을 느낀다는 사람들이 많다. 개인적 일본인은 더없이 정직하고 예의바르고 겸손하다고 했다. 그러나 국가와 집단과 연동(聯動)되면 더 없이 부정직하고 무례하고 뻔뻔해진다. 마약에 취한 듯 집단발작을 일으키기 일쑤다.
이 같은 일본인의 이중성이나 이질성을 ‘국화(菊花)와 칼’로 설명했던 문화인류학자가 있다. ‘베니닉트 루스’, 그녀는 일본인을 ‘국화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면서 마음속에는 서슬 퍼런 칼을 숨기고 있다’고 했다. 일본은 개인과 국가가 별거(別居)하는 이상한 나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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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6년 일왕(日王) 히로히토 어록(語錄)이 관심을 모았었다. 그때 회자(膾炙)됐던 어록 중에는 ‘어버이 마음을 모르는 자식’이라는 말이 있었다. A급 전범(戰犯)의 야스쿠스 합사(合祀)를 주도했던 세력들에게 던졌던 일침이었다.
이를 근거로 한다면 최근 궤변과 망언을 오락가락하면서 각료들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주도한 아베신조(安培晋三) 일본 총리는 그들이 떠받들어 모시는 ‘천황(어버이)의 마음을 모르는 패륜아’가 되어버린 꼴이다.
A급 전범인 외할아버지 기시노부스케(岸信介) 전 총리의 DNA를 가진 아베가 천황을 거슬러 그의 어록을 짓밟아 버린 것이다.
아베의 왜곡된 역사인식은 ‘한반도 식민지 지배가 침략이 아니’라는 망언에 잘 나타나 있다. “앞으로도 그렇게 하겠다“는 침략근성에 찌들어있다. 칼잡이 싸움꾼 ‘사무라이 DNA' 망령이 되살아 난 것이다.
그런데 더욱 한심한 것은 이를 규탄하고 척결해야 할 대한민국 국회의 행태다. ‘일본 각료등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및 침략전쟁 부인 망언 규탄 결의안’을 채택하려다 출석률 저조로 연기해버린 것이다. 입만 열면 나라와 국민을 위한다면서 하는 짓거리가 이렇다.
북쪽에서는 악동(惡童) 김정은의 말도 안 되는 생떼 트집, 바다건너 남쪽서는 섬나라 아베의 비열한 치고 빠지기식 극우적 망언과 망동, 2013년 4월의 마지막 날, 대한민국의 처지는 ‘샌드위치 신세’다. 계절은 봄이지만 고약하고 괘씸하고 불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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