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력 1월 6일에 집집마다 제사상 차려
한집 대여섯 그릇씩 제삿밥 올리기도”
고신종 옹이 겪은 1949년 ‘4·3 대토벌 사건’
한집 대여섯 그릇씩 제삿밥 올리기도”
고신종 옹이 겪은 1949년 ‘4·3 대토벌 사건’

제주4·3연구소는 28일 오후 2시 제주시 열린정보센터에서 4·3증언 본풀이 마당 ‘그때 말 다 허지 못헤수다’를 개최했다.
이날 4·3당시 어머니와 조부모 등을 잃은 고신종(78·제주시 용강) 할아버지는 기억을 조금씩 더듬으며 당시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음력으로 1월 6일은 제주시 용강마을 사람들에게는 명절과도 같다. 제삿날엔 집집마다 한 집에서 대여섯씩 밥을 올린다. 1949년 이날 하루동안 무고한 마을주민 105명이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 고 할아버지가 어머니를 잃은 날도 이날이다.
고 할아버지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그는 “봉개하고 용강 사이, 군인들이 마을 사람들을 포위해서 거기에 다 가둬놓고 쏘아버렸다”며 “사람들을 완전 포위해서 옴짝 달짝 못하게 하면서 무더기로 막 죽였다”고 말했다.
이어 “우리 어머니는 처음엔 나하고 같이 뛰었다. 어머니가 나한테 부락 청년들하고 같이 빨리 뛰라고 해서 난 어머니 얘기만 듣고 혼자 뛰었다”면서 “그런데 어머니는 뛰지도 못한 채 밭 하나 넘어가니깐 거기서 죽어있었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고 할아버지의 어머니는 겨우 밭 하나 넘어 도망가다 총에 맞아 돌아가셨다. 이후 고 할아버지는 아버지와 산에서 숨어 살았다. 하지만 도피자라는 족쇄는 수용소 생활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고 할아버지는 4·3사건으로 어머니뿐만 아니라 할아버지, 할머니, 큰 아버지, 작은 아버지, 작은 어머니를 잃었다. 고 할아버지에게 4·3사건은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이었다. 그런 고 할아버지가 바라는 건 단 한 가지다. 4·3희생자들에 대한 보상이 그것이다.
고 할아버지는 “우린 너무나 억울하다. 어머니 돌아가서 공부도 못하고, 배울 것도 못 배웠다”며 “우리가 돈을 욕심하는 게 아니라 차례로는 후손들, 딸린 자식들한테 달믄 얼마라도 거 광주 사태 같이 많이는 못해도 얼마라도 그렇게 보상하는 게 예의”라며 눈시울을 살짝 붉혔다.
고 할아버지에 이어 4·3당시 두 아들을 숨겼다는 이유로 어머니와 아버지를 잃은 김이선(82·제주시 조천) 할머니는 증언에서 “부모님이 살아계셨으면, 새 옷 한 벌 해드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고 말했다.
또 아버지가 말을 판 돈을 갖고 있었다가 진압군이 쏜 총에 맞아 숨졌다는 변태민(74·제주시 애월) 할아버지의 증언이 이어지기도 했다.
한편, 4·3증언 본풀이 마당은 2002년 제주민예총이 주최한 이후 2004년부터는 제주4·3연구소의 주최로 해마다 4·3을 즈음해 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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