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에만 주민 105명 죽여···우린 너무나 억울해”
“하루에만 주민 105명 죽여···우린 너무나 억울해”
  • 김동은 기자
  • 승인 2013.03.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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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력 1월 6일에 집집마다 제사상 차려
한집 대여섯 그릇씩 제삿밥 올리기도”
고신종 옹이 겪은 1949년 ‘4·3 대토벌 사건’
▲ 제주4·3연구소(소장 김창후)가 28일 오후 제주시 열린정보센터에서 열두 번째 증언본풀이 마당을 연 가운데 고신종 옹이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고기호 기자
“난 어리니까 도저히 사람 죽는 걸 보고 겁이 나서 도망칠 수가 없었어요. 담 옆에 가서 눈 딱 막고 그냥 엎드려 진 채 있었죠. 나중에 보니까 옷에 다 오줌싸지고 했더라고요.”

제주4·3연구소는 28일 오후 2시 제주시 열린정보센터에서 4·3증언 본풀이 마당 ‘그때 말 다 허지 못헤수다’를 개최했다.

이날 4·3당시 어머니와 조부모 등을 잃은 고신종(78·제주시 용강) 할아버지는 기억을 조금씩 더듬으며 당시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음력으로 1월 6일은 제주시 용강마을 사람들에게는 명절과도 같다. 제삿날엔 집집마다 한 집에서 대여섯씩 밥을 올린다. 1949년 이날 하루동안 무고한 마을주민 105명이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 고 할아버지가 어머니를 잃은 날도 이날이다.

고 할아버지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그는 “봉개하고 용강 사이, 군인들이 마을 사람들을 포위해서 거기에 다 가둬놓고 쏘아버렸다”며 “사람들을 완전 포위해서 옴짝 달짝 못하게 하면서 무더기로 막 죽였다”고 말했다.

이어 “우리 어머니는 처음엔 나하고 같이 뛰었다. 어머니가 나한테 부락 청년들하고 같이 빨리 뛰라고 해서 난 어머니 얘기만 듣고 혼자 뛰었다”면서 “그런데 어머니는 뛰지도 못한 채 밭 하나 넘어가니깐 거기서 죽어있었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고 할아버지의 어머니는 겨우 밭 하나 넘어 도망가다 총에 맞아 돌아가셨다. 이후 고 할아버지는 아버지와 산에서 숨어 살았다. 하지만 도피자라는 족쇄는 수용소 생활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고 할아버지는 4·3사건으로 어머니뿐만 아니라 할아버지, 할머니, 큰 아버지, 작은 아버지, 작은 어머니를 잃었다. 고 할아버지에게 4·3사건은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이었다. 그런 고 할아버지가 바라는 건 단 한 가지다. 4·3희생자들에 대한 보상이 그것이다.

고 할아버지는 “우린 너무나 억울하다. 어머니 돌아가서 공부도 못하고, 배울 것도 못 배웠다”며 “우리가 돈을 욕심하는 게 아니라 차례로는 후손들, 딸린 자식들한테 달믄 얼마라도 거 광주 사태 같이 많이는 못해도 얼마라도 그렇게 보상하는 게 예의”라며 눈시울을 살짝 붉혔다.

고 할아버지에 이어 4·3당시 두 아들을 숨겼다는 이유로 어머니와 아버지를 잃은 김이선(82·제주시 조천) 할머니는 증언에서 “부모님이 살아계셨으면, 새 옷 한 벌 해드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고 말했다.

또 아버지가 말을 판 돈을 갖고 있었다가 진압군이 쏜 총에 맞아 숨졌다는 변태민(74·제주시 애월) 할아버지의 증언이 이어지기도 했다.

한편, 4·3증언 본풀이 마당은 2002년 제주민예총이 주최한 이후 2004년부터는 제주4·3연구소의 주최로 해마다 4·3을 즈음해 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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