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며칠 전에 설날을 지내면서 우리가 제일 많이 주고받은 말이다. 우리가 비록 고달프고 힘든 나날을 살아가고 있다 할지라도, 고운 언어로 나누는 축복의 말은 우리에게 기쁨과 위안을 선사한다. 그리고 벽돌과 페이브먼트로 채워진 번잡한 도시의 한 복판을 걸어가면서도, 처음으로 학교에 가게 되는 어린이처럼 사뭇 설레임을 맛보는 것도 이 때가 아닐까 여겨진다. 이 때 우리는 폭풍의 언덕에 홀로 버려진 미아가 아님을 체험한다. 그래서 이웃과 더불어 사랑하는 방법을 익히는 것이다. 우리가 견디기 힘든 외로움을 이겨내는 슬기는 축복의 말이 베풀어 주는 가장 고귀한 선물이다.
우리 모두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외로움을 체험했을 것이다. 정든 이와 사별한 여인, 사업이 실패한 사람, 오래 앓는 사람들, 일터가 없이 헤매는 청년, 돌보아 줄 사람이 없는 노인, 불구자, 유가족 모두가 외로운 사람들이다. 아무리 교재가 많은 사람이라도 때때로 외로움으로 인한 고통을 피할 수는 없다. 그런데 이것은 좀 이상한 말일 수도 있다. 고도로 발달된 과학문명으로 통신수단들은 순간적으로 사람들을 이어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통신수단이 우리의 근본적인 외로움을 해소시키지 못한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우리가 주고받는 말 속에는 외로움의 고통을 용광로에 집어넣어 순수한 모습으로 제련해내는 비술이 들어 있다. 그것은 이웃의 행복이 나의 삶과 직접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믿기 때문이다. “이웃이란 비바람 속을 건너가는 한 배에 탄 선객들과 같은 것이다.” 어떤 소설가의 말이다. “이웃을 사랑하는 일은 영원을 사랑하는 일이다.” 이렇게 설파한 철학자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웃의 행복을 진정으로 축복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건네는 축복의 말 속에는 내가 치러야 할 값비싼 대가가 스며 있음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내가 모든 정성과 노력을 기울여 이웃의 행복을 지키는 파수대의 역할을 담당하겠다는 의지가 포함되어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다치지 않게 하는 가장 좋은 길을 스스로 기쁘게 사는 것이다. 참으로 이웃의 행복과 평화를 바란다면, 먼저 자신을 잘 감시하고 억제할 필요가 있다. 이리하여 우리가 자신에 대하여 느끼는 좋은 감정은 그대로 다른 사람에게도 전달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기쁨으로 이웃을 끌어들일 수 있다. 축복의 말을 한다는 것은 이처럼 이웃의 행복을 지키겠다는 자기 서약인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가식적인 인사나, 어떤 음모를 감추고 있는 웃음이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안다. 이러한 인사나 웃음은 마치 활화산 위에 천천히 맴도는 연기와 같다. 언제 폭발하여 우리를 삼켜버릴 지도 모르는 위험 신호인 것이다. 부정한 상품을 과장하여 선전하는 장사꾼의 웃음, 공직에 출마한 후보자가 유권자의 손을 잡으면서 건네는 축복의 말, 연대보증서에 날인을 부탁하면서 보내는 인사, 이웃의 영예를 질투하는 흉악함을 속에 감추어 둔 채 거짓으로 내뱉는 축하의 말 등등, 이러한 것들도 진정 우리의 행복을 지키는 파수꾼일 것인가? 음모를 품은 인사가 고운 언어로 널리 쓰이고 있는 현실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김 영 환 <전 오현고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