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봉화 선생은 1918년 10월5일 제주도 남제주의 법정사(法井寺)에서 승려 김연일(金連日).강창규(姜昌奎).방동화(房東華) 등이 주도한 항일무력시위에 참가했다.
그는 평소 법정사의 승려 김연일 등과 교류를 통해 항일의식을 키워갔다.
항일의식이 투철했던 김연일은 일제의 한국 강점에 대해 민족적 울분을 참지 못하고 일찍부터 독립운동의 방도를 강구했다.
김연일은 우선 1918년 봄에 강창규.방동화 등의 승려를 중심으로 항일비밀결사를 결성한 다음 신도들을 포섭해 조직을 확대해 갔다.
1918년 10월에 이르러서는 김봉화를 비롯한 30여 명의 신도들이 법정사를 근거지로 동지적 유대를 이루는 가운데, 조직적 결집을 이룰 수 있었다.
이들은 동년 10월5일 김연일을 불무황제(佛務皇帝)로 옹위하고 도대장(都大將) 이하 군직(軍職) 체제로 조직을 편성한 뒤, 제주도 내의 일본인 관리의 처단과 일인의 도외(島外)로의 구축을 행동 방침으로 정하고 무력에 의한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이들은 행동에 앞서 각 면(面)의 이장(里長)에게 격문을 배포해 동참할 것을 권유, 군민 4백여 명이 가세하는 가운데 행동을 개시했다. 이에 김봉화 등은 일경의 연락을 차단하기 위해 전선(電線)을 절단해 각 주재소(駐在所)를 고립시킨 다음 중문(中文) 주재소를 습격했으며, 주재소에 감금됐던 13명의 구금자들을 석방하고, 식민수탈의 전위 역할을 맡았던 일본 상인(商人)들을 공격했다.
하지만 이들은 곧이어 출동한 일본군에 의해 이틀만에 피체되고 말았다.
그는 이 일로 1919년 2월4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소위 소요(騷擾) 및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받아 옥고를 치르던 중 모진 고문으로 인해 1919년 12월 1일에 옥중 순국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