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는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니라서 그런지 초등학교에서부터 대학까지 어디서도 대화법을 가르치지 않는다. 직장에 들어가서야 부랴부랴 대화에 대한 교육을 받지만 굳어져 버린 대화습관에 놀란다.
대화란 무엇인가. 서로 마주 대하여 직접 이야기함, 또는 주고받는 이야기이다. 대화는 ‘주고받는’ 이야기임에도 그런 대화가 참 힘들다.
셋 이상만 모이면 ‘말 잘하는 사람’이 얘기를 시작한다. 혼자 웃고 떠들면서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계속할 기세다.
사실 듣는 사람에게는 경제학의 ‘한계효용체감의 법칙’이 적용된다. 대화 상대방의 말을 듣고 느낄 수 있는 만족을 효용이라 한다면 그 효용은 시간이 흐를수록 체감될 수밖에 없다.
듣는 사람은 말할 기회를 갖지 못하니 심하게 말해서 설교를 듣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시간이 흐르면 한계효용이 제로가 된다. 당연히 그 다음은 듣기가 짜증스럽다.
말에 도취된 사람에게 말을 그만하라고 하기가 뭣해서 가만히 있는 줄을 모른다. 자기가 말을 잘해서 그런 것으로 오해를 한다. 피할 수 있으면 피하고 싶은 사람이다. 대화가 안 되니 피곤할 뿐이다.
대화는 일상생활에서 무엇보다 중요함에도 대학의 교양과정에 대화술이 편성돼 있다는 얘기를 못 들었다.
웬만한 대학의 평생교육원에서는 100개에 가까운 갖가지 과정이 개설돼 있다. 물론 학력을 인정하지 않는 과정이니만큼 누구나 수강이 가능하다. 그럼에도 화술이나 유머 화법 같은 과정이 개설되지 않은 것은 왜인지 모를 일이다.
소통의 원활을 가능하게 하는 대화법으로서는 유머 화법이나 제스처도 한 몫 할 것이다. 유머 화법 같은 것은 좀체 저절로 체득하기가 어려우니 문제다.
대화가 일상에서 소통의 근간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중요성을 알 수 있다.
다문화가정이 익숙해진 형편에서 결혼 이주한 외국인이 겪는 애로사항의 첫째가 대화의 부재와 문화의 차이라고 한다. 언어를 매개로 하는 대화에서 말을 모른다는 것은 애초부터 소통의 벽이다. 국제 언어인 손짓, 발짓으로 조금은 해결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한계가 있다. 소통에 이르기까지는 많은 시행착오와 노력이 필요함은 물론이다.
다문화가정의 파탄은 주로 대화의 부재에서 비롯됨을 짐작할 수 있다. 살아가는 과정이 맑은 날만 잇는 것이 아님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삶에서 비 오고 흐린 날을 슬기롭게 대처함은 바로 원활한 대화다. 따뜻한 말 한 마디에 풀리지 않을 것 같은 답답함도, 아픔도, 원망도 스르르 풀리는 것이 사람이 아니던가.
대화의 부재는 어느 가정에서나 흔들림의 원인이 될 수 있고, 부모의 이혼으로 자녀들은 쉽게 탈선의 길로 접어든다.
성난 얼굴로 대화가 가능할까. 결국 대화의 부재로 이어진다. 마음에 맞지 않는 사람과 장시간 앉아 있음도 고역인데, 한 집에서 밥을 먹고 늘 마주 닥치면서 생활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대화가 없으니 맺힌 것이 있으면 오해로 이어진다. 그 다음은 자녀에 대해 생각함도 없이 이혼으로 이어진다.
젊은 사람의 이혼뿐만 아니라 수십 년간 생사고락을 같이한 부부도 황혼이혼을 하는 현실이다.
이혼사유에는 제3자가 생각하기 어려운 이유도 있겠지만, 오순도순 대화가 있었던들 황혼에 그럴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면, 아니라는 느낌이 강력하게 떠오른다.
감수성이 예민한 중고등학교 학생들의 자살이 무척 아쉽다. 나중에 부모가 한다는 말이 “최근 몇 달 동안 말이 없고 많이 침울해 했다.”이다. 말이 없으면 왜 그런지 확인해 보려는 노력을 어떻게 했다는 기사는 찾아볼 수 없다. 아예 대화의 시도가 없이 방치했다는 결론이다.
대화로 자녀의 어려움을 함께 풀려고 했으면 아무리 막가는 사회일지언정 쉽게 자살을 택했을까.
그 젊음이, 꽃다운 나이가 아쉬워서 하는 얘기다.
대화는 주고받는 이야기이다.
세상 삶의 모든 어려움의 절반은 대화가 해결해주지는 못하지만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오태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