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 살면서 ‘~강?’은 일 년에 세 번은 인사로 듣는다.
4월엔 ‘전정, 다 헙디강?’, 9월엔 ‘벌초, 다 헙디강?’, 12월엔 ‘미깡(밀감) 다 탑디강?’이다.
조상의 묘소를 돌아보고 무성한 잡풀을 제거하는 일인 벌초가 제주에만 국한되지는 않지만, 이 지역에서 유별난 풍습이다. 가끔은 일본에 거주하면서도 오로지 벌초를 하기 위하여 잠시 귀국하는 것만 봐도 그렇다.
공무원과 기타 직장문제로 벌초에 참여하지 못하는 후손이 없게, 음력 팔월 초하루 전후의 일요일을 ‘모듬벌초’날로 정해 놓은 가문이 대부분이다. 시기적으로도 일 년 중 묘소에 잡풀이 가장 무성할 때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때가 되면 제주의 산야는 사람과 자동차로 만원이 되고, 만나는 사람마다 ‘벌초, 다 헙디강?’인사를 건네게 된다.
시대가 변화함에 따라 벌초문화도 많이 퇴색되어 가고 있고, 언젠가는 없어지리란 전망이다. 예전엔 어린이들도 부모를 따라 벌초에 나서는 것을 당연시했다. 조상을 알고 소중한 풍습을 체험하면서, 친척의 의미를 새롭게 깨닫는 계기였다. 아무개는 너와는 형과 동생의 사이가 되고, 아무개는 삼촌뻘이 된다는 교육을 받으면서 오늘의 청장년이 되었다. 또 가족묘역의 제일 위에 모셔진 할아버지는 우리의 몇 대 조가 된다는 둥 친절하게 전체를 소개해 주시는 어르신이 계셨다.
오늘도 그러한가. 어린이들은 벌초에 별 도움이 되지 않으니까 빠지고, 친척에 대한 교육을 하는 어르신도 없다. 아무개와 아무개는 몇 촌간이고 하는 가르침이 없으니, 나이가 많으면 형이고 삼촌이라는 잘못된 인식에 굳어지는 청년이 많다.
벌초가 중요하긴 하지만 일본에서까지 많은 비용과 시간을 들이는 것은 생각해 볼 문제다. 그러다 보니 서울이나 기타 지역에 사람은 벌초에 참여하는 것을 원칙으로 생각한다. 벌초에 참여를 않으면 고향에 사는 사람만 벌초를 하란 법이 어디 있느냐고 구시렁거린다.
서울에서 직장을 다니는 막내 동생도 올해 ‘모듬벌초’에 참여했다.
벌초 때는 설날보다도 많은 친척을 만나게 된다. 벌초가 단순히 풀베기가 아니라 조상의 음덕을 생각하고 친족의 정을 나누는 기회이니 발전적인 형태로 나갔으면 한다.
‘모듬벌초’를 숨도 안 쉬고 일시에 해치우고, 지정된 식당에서 밥 먹을 생각만 하니 문제다. 열 시를 겨우 넘겼는데, 무슨 점심인가.
벌초 철이 되면서 신문의 벌초대행 광고가 많이 늘었다. 타지에 거주하는 사람은 시간과 비용의 문제로 자기가 관리하는 묘소의 벌초가 만만치 않은 고민거리가 되고 있다. 벌초를 포기하는 것보다 벌초대행업체에 맡길 수 있음은 다행한 일이다.
그러나 자기가 직접 찾아도 찾기 어려운 묘소를 대행업체가 제대로 찾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벌초 때마다 한 번씩 생각해 보기 마련인데, 제주의 장묘문화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생각해 본다. 제주지역 화장률도 그 동안 크게 높아졌지만, 아직은 전국에서 꼴찌라고 한다. 지역적 배타성으로 낮은 증가세를 보이는 것이 아닐까.
도시화, 핵가족화가 가파르게 진행되면서 벌초 등 조상의 묘소를 관리하는 어려움이 가중되고 있다. 고인의 유골을 납골당이나 가족납골묘에 안치하는 사례가 늘어가는 이유다.
벌초를 하면서 산야로 돌아다니다 보면 가족이나 문중의 납골묘 또는 납골당이 흉물스럽게 산야의 한 구석을 차지한 것을 볼 수 있다. 해당 묘소의 주인들이야 큰 효도나 한 것처럼 생각할 터이지만 그건 아니다 싶다.
화장 문화의 확산과 함께 같이 생각해 봐야 할 부분이다. 화장만 하면 그 다음은 문제가 아니라는 건 잘못된 생각이다.
아직은 수목장이나 산골같은 자연장이 시도단계이지만, 국제자유도시로 가는 마당에 제주의 장묘문화로 알맞지 않을까 한다.
나는 어느 날 아들과 편안한 대화를 나누다가 유언을 해뒀다. 작년 12월의 대형 교통사고로 죽을 번한 것이 계기가 됐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거든 화장을 해서 수목장으로 해 달라.” 4대 장손인 내가 수목장의 유언을 해둘 만큼 시대가 변하고 있다.
오태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