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이 순간을 잘 넘기려면
오늘, 이 순간을 잘 넘기려면
  • 제주매일
  • 승인 2012.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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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같은 이런 가을날이면 나는 그 어디인가에 있을 이승에서의 생의 종착역을 생각해 보곤 한다. 그 생각은 언제나 나를 인간존재의 본원적인 가치문제, 이를테면 삶과 죽음이며, 찰나와 영원이며, 보다 값진 삶의 자세 같은 것들에 대한 이런저런 다짐들을 하는 습관이 있다. 그 다짐들이 결국은 속빈강정이 되어 버리고 말지라도, 어쨌든 그러한 생각의 오솔길을 거닐고 있는 순간만은 마음이 푼푼함을 느낀다.

심사가 흐트러질 때는 이승에 잠시 머물다 떠난 사람을 생각하는 버릇이 있다. 덧없이 스러지며 가버린 유명무명의 안타까운 이름들, 내 오늘 이 순간을 살아 어쭙잖은 글 몇 줄이나마 세상에 남겨 놓을 수 있음이 얼마나 감사해야 할 일인가하고 생각 하는 것이다. 꽃 피는 봄, 녹음 짙은 여름, 단풍 고운가을, 눈 내리는 겨울의 정취를 아직도 보고 듣고 느끼며 노래 부를 수 있음은 내가 살아 있음으로 해서 덤으로 누리게 되는 축복이 라고 생각하면서 이런 순간을 넘긴다.

더 높이, 더 크게, 더 많이 차지하려는 집착으로 가득한 삶일수록 언제나 목마름도 그만큼 깊어지는 법, 눈높이를 한 뼘만큼만 낮추고 살아가야겠다고 이런 순간에 재 결심을 해본다. ? 높은 자리에 있을 때는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잘 모른다. 그 자리에서 물러나 낮은 곳에서 봐야 비로소 그 위험성을 깨닫게 된다. 채근담에서 전하는 말이다.

“삶에의 욕망이 분에 넘치면 죽음의 허망함을 쉽사리 알아차리지 못한다. 우리는 늘 일상의 틀에 갇혀 아옹다옹하면서 죽음을 저쪽 외진 구석에다 세워둔 채 살아간다, 마치 영원한 타인이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그러다 어느 날 피를 나눈 부모형제며 사랑하는 식구들이며 아끼는 벗 그리고 진실한 동료……, 주위에 있는 가까운 이들의 느닷없는 죽음 앞에서, 내게는 결코 다가오지 아니할 것 같았던 사신(死神)의 그림자와 마주하곤 그때서야 허둥거리게 되는 것이 아닐까하고 이런 때 생각을 잡아 본다.

죽음은 삶의 연장선상에 엄숙히 자리하고 있는 무형의 실체, 살아간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죽어간다는 것의 또 다른 표현일 따름이다. 우리가 죽음 앞에서 두려워 떨지 않고 당당하려면 미리부터 항시 죽음 쪽으로 마음의 귀를 열어 두어야 하리라고 이런 때 생각을 다진다.

오늘 같은 우울한 심정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불청객으로 찾아오는 슬픔, 좌절, 분노의 순간을 잘 넘기려면 어떤 생각을 습관적으로 해야 하는 것일까?

세상의 이치와 인간 정신에 대한 성찰은 인기 있는 희곡 작가의 전유물이 아니라며, 평생 그 해답을 찾는 데 고뇌를 바치는 사람들을 철학자라 불린다. 소크라테스 이전의 소피스트들부터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거치면서, 세계와 만물의 본질에 대한 관심은 인간과 현실의 삶으로 조금씩 옮겨졌다. 그리스의 철학자 포르피리오스는 어쨌든 모든 사색과 고민은 결국 삶에서 비롯되며, 이 고통을 치유하는 것은  철학이라고 했다.

삶의 고통을 치유하기 위해 스토아 철학에서부터 행복, 명예부터 노년 죽음까지 현실적이고 일상적인 문제에 대한 답을 찾으려고 지금까지  철학은 연구학문으로 오고 있는 것이다. 철학에서 “지금 여기(here&now)”에 집중하라”는 것도 오늘 이 순간을 잘 넘기라는 의미이다.

“과거는 지나갔고, 미래는 오지 않았다”고 보니까 당연히 오늘의 삶을 껴안으라는 메시지다.

분노? 좌절? 슬픔? 그건 “나를 너무 사소 한 것에 소비하는 행위”에 불과 하다는 의미다. 우리들의 수수께끼 같은 삶이란 대체 무엇일까. 한 철학서에서의 설명이다. “철학은 추상적이지만 추상적으로 말하지 않는다며,  즉 삶이란 결코 만만치 않는 격투기로 비유하고 있다. 이때 거의 피할 수 없이 끼어드는 게 고난인데, 이걸 삶의 축복으로 받아드리라고 조언한다.”. 고난을 축복으로 유턴하라는 말인데,  쉽지 않는 일이다

한 철학책에 있는 말을 그대로 옮기면 부정적 상황을 습관화 하라고 한다. 그래야 슬픔, 불안, 걱정, 등의 순간에 내면의 단단함과 평상심을 유지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부정적 상항설정은 간단하다. “이보다 더 나쁠 수도 있는데, 이만하면 다행”이라고 하는 생각의 습관을 기르라는 것이다.<직언, 월리엄B지음,  박여진 옮김>

이 철학서의 핵심은 우리들의 아무리 나쁜 상황이라도 지금보다 더 나빠질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라는 것이다. 당신의 삶이 아무리 고달프다고 해도 누군가는 당신의 삶을 살고 싶어 할지 모른다는 것이다. 전신마비로 살아가는 누군가의 삶은 아마도 하반신만 마비된 환자가 꿈꾸는 삶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왜 우리들의 삶은 항상 흔들일까? 우리 인간들은 애초부터 만족을 모르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원하는 것을 얻고도 이내 지루하며, 더 큰 욕망을 꿈꾼다, 원인은 쾌락 설정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만족 할 수 없는 굴렁쇠”를 끊임없이 굴리는 게 인간이다.

그리고 굴렁쇠를 굴리는 상태에서 벗어난 것이 이른바 평정심이다. 그런 요소는 불교의 ‘해탈’이나 ‘열반’과 맥을 같이 한다, 삶의 모든 번뇌의 얽매임에서 벗어나 평상심의 경지에 진입한다는 의미다.

이 같은 철학자들의 쓴 소리는 우리들의 흔들이지 않고 살기 위해서는 삶의 원칙과 기술이 필요하다는 것인지도 모른다. 오늘 이 순간이 중요한 것도 사실이지만, 오늘은 우리들의 여생에 첫날이이니까 더욱 중요한 것이다. 

수필가 김찬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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