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춘기(思春期)와 사추기(思秋期)
사춘기(思春期)와 사추기(思秋期)
  • 제주매일
  • 승인 2012.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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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이 처서(處暑)다. 가을은 ‘땅에서는 귀뚜라미를 등에 업혀오고, 하늘에서는 뭉게구름 타고 온다.’는 날이 처서다.

입추(立秋)가 지나도 폭염은 여전히 찌더니 오늘은 처서가 되어서인지 햇살과 바람에 가을 냄새가 창가에 배어난다. 이처럼 속일 수 없는 절기가 찾아  오듯이 우리들의 삶에도 사계절이 있다. 삶에도 유년기를 봄, 청년기를 여름, 장년기를 가을 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삶의 봄을 맞이하면 누구나 예외 없이 ‘사춘기(思春期)’를 거친다. 또 누구나 삶의 가을을 맞을 즈음엔 ‘사추기(思秋期)’를 겪기 마련이다.

사추기는 마음의 갱년기다. 인생의 중반기를 넘으면 더 이상 사회가 자신을 버리고  또 필요치 않은 존재라고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인생 후반전 삶에서는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후배들은 밑에서 치받으며 커오는데 자신은 여전히 답보이다 못해 퇴보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런 때이다. 그래도 육체적으로는 생활에 어려움은 없지만, 마음의 자신감은 시들해져 점점 주눅 들고 스스로 가라앉는 시기다.

게다가 간이 졸아들어서인지 세상에 만만한 것들이 하나도 없어 보여 뭣 하나 결단도 결정도 하지 못한 채 세월만 흘려보내는 시기다. 유년기의 삶에 사춘기는 ‘반항’이 특징이라면 장년기에 나타나는 사추기의 특징은 ‘우울’이다.

여성들의 경우엔 ‘폐경기’를 전후해서 우울증이 동반되는 경향이 많다지만 남자들의 경우엔 사회적 활동이 축소되거나 정지 되면서 급격히 우울해지기 십상이라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더 이상 올라 갈 길은 없어 보이고 내리막만 눈에 보이니 의욕도 안 나고 살맛도 안 나는 게 당연지사인 듯싶다. 그래서 사추기 여자들은 사소한 일에도 서운해 하고 작은 일에도 삐지기 일 쑤다.

사춘기는 일종의 성장통(成長痛)이다. 자라려면 아픈 것이다. 하지만 사추기는 일종의 정지통(停止痛)이다. 멈추는 게 쉽지 않아서 좌절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춘기의 비상구는 ‘가출’이다 그러나 사추기의 만만한 비상구는 ‘산행’이다. 산을 오르면서 좌절과 허전을 달래는 것이다.  사춘기 치료제는 ‘대화’이다. 하지만 사추기 치료제는 ‘걷기’다.

사추기를 달래려고  주말마다 같이 산행을 하는 한 친구가 우리 산행멤버들에게 야무지게 살자는 의미의 멘터링 스토리 다.

이 친구는 평소에 뉴스 빼놓고 웬만해선 텔레비전 앞에 앉질 않는다고 했다. 텔레비전이란 것이, 보면 볼 때 그 때뿐, 나중에 가서 남는 게 없는 ‘공공의 적’이라는 어쭙잖은 소신 때문이라는 말이다. 이런 그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어느 날에 개그 프로에 넋을 놓고 시청했다는 말을 하면서, 자신의 아내에게서 텔레비전 시청에서 취득한 이런 사추기 치료법 들었다는 것이다.

그 친구의 아내가 남편의 사추기 우울을 항상 걱정하는 편인데, 하루는  아침 밥상머리에서 아내가 느닷없이 질문 하나를 던져 왔다는 말이다. 현대인이 성공할 수 있는 조건으로 뭐가 가장 중요한지 알고 있느냐는 거였다.

대답을 찾지 못해 머뭇머뭇 거리고 있으려니, “거 봐요”라면서 참 답답한 양반이라는 투로 자답을 한다. 자기도 텔레비전 명랑 프로를 보고 알았다면서 ‘ㄲ' 자가 들어가는 여섯 가지라고 일러주었다. 그 여섯 가지란 곧 ‘꿈, 꾀, 깡, 끼, 꼴, 끈’이라는 것이다.

?비록 우스갯소리일망정 듣고 보니 참 그럴 듯도 하겠다며 고개가 끄덕여지였다는 말이다. 나도 물론 지역마다, 사람마다 정서나 가치관에 따라 조금씩은 다를 수야 있겠지만, 근본을 따지고 들자면 엇비슷하지 않을까 싶었다.

삶의 방법도  자신의 사추기입장에 따라, 시대 따라 바뀌어도 자신에게 좋으면 좋은 것이다. 아시다시피 예전에는 지조며 절개 따위를 그 어떤 가치보다 으뜸으로 쳤다. 지조와 절개를 지키려다 목숨까지 잃는 일도 생겨났었다.

그러나 세상이 변하고 있다. 그런 것들을 들먹이고 나서면 19세기식이라고 콧방귀만 뀐다. 대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남보다 앞서고 남보다 우위에 오르는 것을 지상 최대의 과제로 생각하는 가치는 구닥다리 가치관이다.

이러려면 가치기준도 판이하게 달라져야 한다. 물론 신언서판(身言書判)이라는 말도 있듯이, 예나 지금이나 생김새 곧 ‘꼴’이야 여전히 사람의 으뜸가는 평가기준이 되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나머지 다른 가치 관념은 세월 따라 변해 온 것도 사실이다. 고리타분하게 지조가 어떠니 정절이 어떠니 하다가는 사추기에 ‘우울’하는 어리석고 미련스러운 족속이 될 수 있다.

대신 뭐라도 해서 사추기를 해결하려면 어떤 쪽으로든  한번 미쳐 봐야 된다고들 한다. 연전에 어느 작가가 낸 ‘불광불급(不狂不及)』이라는 책의 제목 역시 그런 뜻으로 읽힌다. 이것은 곧 ‘꿈’을 품고 그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끼’를 발휘하여 ‘깡’으로 밀어붙여야 한다는 이야기다. 이게 사추기 정지통(停止痛)을 넘기는 대안이다.

그렇다고 깡만 있어서 되는 것도 아니다. 깡만 갖고 무작정 덤벼들다가는 자칫 가을 병보다 더 무서운 겨울 병을 맞을 수도 있다. 그래서 적당히 ‘꾀’를 부려야 하고, 거기에다 든든한 ‘끈’까지 뒷받침된다면 당신들의 사추기 치료는 따 놓은 당상일 것이다.

수필가 김찬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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