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사 델 아구아’ 이 자리에 계속 머물 수 있게 해주세요.”
멕시코 출신 세계적인 건축가 리카르도 레고레타(1931∼2011)의 유작인 ‘더 갤러리 카사 델 아구아’가 철거될 위기에 놓이자 어느 한 시민이 남긴 말이었다.
‘카사 델 아구아’는 서귀포시 중문관광단지 앵커호텔의 콘도 분양을 위해 지난 2008년 8월에 지어진 가설 건축물로 스페인어로 ‘물의 집’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최근 ‘카사 델 아구아’가 강제철거 직면에 처했다.
앵커호텔의 사업자였던 ㈜JID가 자금난으로 사업에서 손을 떼면서 부지의 소유가 ㈜부영으로 바뀌게 됐고, 부영이 ‘카사 델 아구아’를 인수대상에서 제외하면서 존치 기간을 연장하지 않아 지난해 6월부터 불법 건축물이 됐다.
결국 지난 5월 서귀포시는 “세계자연유산총회 참가자 숙소를 지어야 한다”며 JID측에 강제철거를 내용으로 하는 행정대집행 영장통지처분을 했다.
JID는 서귀포시를 상대로 ‘대집행 영장통지처분 취소’ 청구 소송을 제기하며 맞섰으나, 지난달 25일 법원은 서귀포시의 행정대집행 영장통지처분이 정당하다는 판결을 내렸다.
존치기간이 만료된 가설 건축물을 자진 철거하지 않으면 행정 대집행을 하겠다고 통지한 처분이 적법하다는 판결이 나오면서 사실상 ‘카사 델 아구아’는 철거를 피하기 힘든 상황에 처하게 됐다.
▲ 제주가 품고 있는 또 다른 ‘건축 유산’
‘카사 델 아구아’ 건축 당시 리카르도 레고레타는 “한국 전통 건축에도 색채가 많이 사용된 것을 보고 반가웠다”며 “제주도에 우리는 조금 더 따뜻하고 인간미가 느껴지는 밝고 즐거운 공간을 짓고 있다”고 말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건축물이 바로 ‘카사 델 아구아’다. 특히, 레고레타가 제주를 보고 느꼈던 예술적 감성이 고스란히 베어있는 데 물, 돌, 바람, 공기, 햇빛 등 제주의 자연을 오롯이 느낄 수 있다.
‘카사 델 아구아’를 방문한 이들은 하나 같이 “단순한 가설 건축물이 아니”라고 입을 모은다. 이 곳을 찾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카사 델 아구아’는 이미 일반적인 모델하우스가 아닌 살아 숨쉬는 듯한 생명력을 지닌 ‘건축 유산’이다.
‘카사 델 아구아’가 더 가치있는 이유는 아시아 단 2개 밖에 없는 레고레타의 작품 가운데 유일하게 내부를 들여다 볼 수 있다는 점 때문이다. 일본에 있는 작품은 내부를 들여다 볼 수 없게 돼 있다.
지난해 레고레타가 세상을 떠난 지금, 우리는 제주에서 레고레타의 유작을 눈으로 보고 있다.
▲ ‘옛 제주대 본관’ 전철 밟나
한국 현대건축의 거장 故 김중업 선생(1922~1988)이 지난 1964년 헬기모양으로 설계한 옛 제주대 본관 건물은 제주를 대표하는 건축물이었으나, 1995년 수많은 논란을 뒤로하고 결국 철거된 바 있다. 때문에 카사 델 아구아가 옛 제주대 본관 건물의 전철을 밟게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정방폭포 인근에 있는 ‘소라의 성’ 또한 김 선생의 작품으로 지난 2004년 재해위험지구로 지정돼 철거 논란이 끊이지 않았지만, 김 선생이 설계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결국 보존돼 현재는 ㈔제주올레 사무국 사무실로 쓰이고 있다.
‘카사 델 아구아’의 철거 소식이 알려지자 한국건축가협회는 지난 1일 철거를 반대하는 공식입장을 천명하고, 제주도와 부영 앞으로 추후 계획과 존치 대안을 묻는 질의서를 보냈다.
질의서를 통해 협회는 “‘카사 델 아구아’는 철거를 전제로 한 가설 건축물이었으나 다시는 볼 수 없는 세계적인 건축가의 유적”이라며 “이를 문화적 공간으로 환원하고 공적인 목적으로 활용될 수 있다면 많은 부분들이 쉽게 해결될 것”이라고 말했다.
소통의 부재와 경제적 이권 창출 등을 위해 세계적인 건축물이 철거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이런 난국에서 칼자루를 쥔 자는 제주도와 업체 등 이해관계자들로, 세계적인 건축가의 유작을 법의 잣대로만 판단하지 않고, ‘카사 델 아구아’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좋은 건물은 가난한 사람이거나 부자이거나 그 공간에서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던 리카르도 레고레타.
그의 말처럼 ‘카사 델 아구아’가 지켜져 더 많은 이들이 레고레타의 ‘편안함’을 느낄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