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1년 9월 6일 그는 송성철과 함께 국제무산청년일에 시위투쟁을 벌이기 위해 선전물을 작성.인쇄하는 한편 거사 당일날 인쇄물을 각처에 배포했다.
또한 1931년 10월 동지들을 포섭하는 한편 11월 7일 러시아혁명일을 기해 축항 인부 40여 명을 지도, 임금인상을 요구하는 시위를 전개했다.
이후 그는 주로 축항 인부를 대상으로 항일 사상을 전파하며 조직원을 포섭해 갔다. 그러던 중 1932년 초 강창보가 일경에 발각 피체되자, 그는 조직 재건을 위해 동지를 규합하던 중 일경에 피체돼 1932년 5월 목포지청 검사국에서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그는 출옥 직후 활동을 재개해 1932년 6월 부병훈.김경봉.김일준 등을 배후에서 지도하면서 제주도 농민조합 창립준비위원회를 결성케 했으며, 1933년 8월에 정충조와 힘을 합해 정세 판단에 따른 운동노선과 방침을 정하고 조직 활동의 범위를 확대해 갔다.
그러던 중 1934년 말 조직이 발각됨에 따라 피체된 그는 1935년 1월 7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예심에 회부됐으나,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병보석으로 출옥 후 1937년 7월 13일 순국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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