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문인 2백50명 시대
제주문인 2백50명 시대
  • 제주타임스
  • 승인 2005.01.2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아, 제주문인이 2백50여명이라, 이거 너무 많지 않은가? 문인협회 회원 1백90여명, 작가회의 회원 60여명 모두 합쳐서 2백50여명, 가히 문인의 춘추전국시대이다. 내가 서울을 오가며 습작에 열을 올릴 때만 해도, 제주문인은 손가락을 꼽을 정도였다. 소설가는 최현식과 오성찬 정도였다. 등단하는 일이 너무 치열하여 한숨만 쉴 때였다. 동무들이 모이면 사법시험이 어려운가? 아니면 문단 데뷔가 어려운가? 라고 토론을 벌이기도 하였다.

 예전에는 문인, 하면 상당히 위엄이 있고 권위도 있었다. 전국에는 지금, 2백이 넘는 문예지가 발간되고, 1만 명이 넘는 문인이 활동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시대를 문학의 위기라고 말한다. 반면에 독자는 엄청나게 줄었다. 독자들이 좋은 작품인지 나쁜 작품인지 구별할 줄도 모른다.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 문인이 되었다는 소문도 나돈다. 이게 뭐 포스트모더니즘 현상인지는 모른다. 문학 작품에 대한 선별도 없고, 예술인지 예술이 아닌지 구별도 못하고, 이런 시대이니까 이것이 바로 문학의 위기라고 말할 수 있겠다.

 지난 해 12월 29일, 제주문인협회 송년 모임이 있었다. 원로 문인들로부터 신입회원까지 가히 문인 풍년을 실감하는 자리였다. 문인협회장 선거가 다가와서 그런지, 아니면 신입회원이 신고식을 치른 날이라 그런지 발 디딜 틈도 없이 북적거렸다.

현재 제주문인협회 회원은 정확하게 192명. 시인 61명, 시조시인 18명, 소설가 9명, 수필가 73명, 희곡작가 2명, 아동문학가 21명, 문학평론가 4명, 번역문학가 4명.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가 되어버렸다.
 식자들은 제주문학의 기점을 한국전쟁으로 잡는다. 지역의 불모성을 개척하고 문단을 형성하기 시작한 것은 바로 피난 문인들이기 때문이다.

당시 피난 문인과 도내 문학동호인의 참여로 문학활동은 싹텄으며, 박목월을 필두로 김영삼 문덕수 함동선 이성환 등 시인들이 입도하였다. 1956년에는 김영삼이 중심이 되어 제주문학동호인회를 결성하고 이를 한국문학제주도지부로 발족시켰으며, 1959년에는 제주문인협회가 창립되기에 이르렀다. 이 시기에 중앙 문단에 데뷔하는 문인들도 생겨났다.

50년대에는 시에 양중해 김종원, 소설에 최현식, 60년대에는 시에 김광협 김용길, 소설에 오성찬, 평론에는 박철희 김시태 김영화가 중심을 이루었다. 50년대가 중앙문인 중심으로 제주문단이 이루어 졌다면, 60년대는 본도 출신 문인들로 이루어진 문단이라고 할 수 있다. 50년대가 제주문단의 정지작업기였다면 60년대는 이를 바탕으로 한 발전기였다. 60년대가 씨를 뿌린 시대였다면, 70년대는 열매를 거둔 시기였다.

 삶을 형상화하고 그 삶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 문학의 소명이다. 문학이 설정해야 할 과제는 마땅히 민중의 문제이다. 그렇다면 제주문인이 제주민중과 더불어 제주민중의 언어로 작품활동을 전개하고 있는가? 라는 원초적인 질문을 던져본다. 제주의 수난 과정에서 그 비극을 항상 덩어리로 받아들이고 역사의 줄기를 꿋꿋이 형성해 온 제주민중은 번번이 지배층에 이용당하는 도구가 되어오지 않았는가? 

제주사의 실질적인 골격이며 구조의 중핵이면서도 현실적인 면에서 늘 설움을 받은 밑바닥 군상을 가슴에 껴안아야 한다. 제주문학이 사랑으로 포용하고, 제주인의 절망을 희망으로, 제주인의 침묵을 소리로 바꾸는 작업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러나 제주문학은 아직은 아니다, 아직도 멀었다, 는 결론에는 너무 우울하다                     

김 관 후 논설위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