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추의 여지가 없이 들어선 관중, 야구시합은 절정에 이르렀다. 투수가 공을 던지고 주심이 아웃판정이 내려지는 순간 해설자의 빠른 해설이 이어졌다. “타자의 선구안이 대단하네요.” 해설자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일루로 달려가는 타자에게 찬사를 보냈다.
이사 만루, 다음 타자가 홈에 들어섰다. 해설자는 타자의 선구안에 대한 설명을 이어갔다. 투수가 던진 유인 구에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간 타자는 방망이를 무모하게 휘두르다가 만루 찬스를 노치고 말았다.
이 때 해설자가 타자의 선구안에 대하여 날카롭고 매서운 질타 성 해설을 시작했다. 이 광경은 프로야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지만 뜬금없이 선구안이라는 말이 시사하는 바가 크게 받아드려지는 게 작금의 세태다. 야구해설자가 열변을 토하는 선구안의 사전적 의미는 투수가 던진 공 가운데 볼과 스트라이크를 가려내는 타자의 능력을 말한다.
신년 벽두에 갑자기 불거져 나온 교육부총리의 임명과 사퇴까지의 삼일 간을 지켜보면서 야구경기 때 해설자의 전유물이나 다름없는 선구안에 대한 말들이 사회저변에 회자되고 있다. 총리가 추천하고 청와대에서 대통령 보좌진이 철저하게 검증을 거친 인사였다는 말을 들으며 더더욱 선구안이란 말에 무게가 실린다.
교육부총리, 그 자리가 어떤 자리인데,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에 버금가는 자리가 아닌가. 이유를 차치하고 그 막중한 자리를 놓고 입방아를 짓게 된 현실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이제 곧 잦아들겠지만 우리는 매사에 너무 관대한 게 탈이다. ‘이 정도쯤이야’하는 관대함이 비록 삼일간이지만 세상을 시끌벅적하게 쑤셔놓았다.
대학총장시절의 판공비 문제하며 사외이사 문제, 특례입학 문제 등 다 지나간 이야기로 치부하기엔 우리의 관대한 정서가 그까지는 미치지 못하는 걸 모르고 있었던 듯하다. 총리가 추천하고 대통령 보좌진이 검증을 걸친 보편적이고 타당한 인사라는 말을 들으며 씁쓸하게 입맛을 다시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하기는 그 자리를 얼른 받아드린 당사자의 문제가 더 크다. 설마 하는 안일함이 그것이다. 이번에 불거져 나온 아들의 국적포기문제는 아버지로서 잘 아는 일이었을 텐데, 그 것 역시 ‘아들의 문젠데 별 탈이 없겠지’하는 도덕불감증이 사태를 자초하는 결과가 되고 말았다.
이번의 인사는 우리 사회에 팽배한 ‘노블레스 오블 리즈’(noblesse oblige) 말하자면 지도층에 요구되는 도덕적 의무에 대한 불감증을 극명하게 나타낸 단편적 사례다. 만일 그가 도덕적 결함을 밝히고 자리를 고사했더라면 신년벽두부터 곤욕을 치르는 일은 없었을 터다.
‘나 혼자쯤이야 하는 반칙문화’가 본인은 물론이거니와 우리사회의 품격을 깎아내린 신년벽두의 삼일간은 우리의 입맛을 씁쓸하게 했다. 우리는 언제나 그랬다.
사건이 터지면 호들갑을 떨다가도 그 때만 지나면 금세 잠잠해지는데 길들여져 왔다. 유야무야 지나치며 ‘이 정도쯤이야’ 했던 일이 어디 이번뿐이었을까.
사람을 가려 쓴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는 역사적으로도 전해진다. 세종대왕도 인재를 가려 쓰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던 듯하다. 곳곳에 인재는 있는데 가려 쓰는 게 문제라고 토정하고 있다.
이번의 교육부총리 인사가 그렇다. 개인적으로야 자질을 갖춘 인재임이 분명하지만 당사자는 물론 추천한 총리나 검증을 맡았던 청와대에서 그의 도덕성을 간과하고 만 것이 큰 불찰이었다. 이것이 곧 섣부른 관대함이 자초한 부끄러운 결과가 되고 만 것이다. 새해 벽두부터 야구선수의 선구안이 떠오르는 연유를 이제야 알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