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인 문 정현 신부는 1974년 고 지 학순 주교와 민청련 사건으로 구속되자 사제 30 여명과 사제 단을 만들어 민주화 운동에 앞장섰다.
1976년에는 유신 독재를 비판하는 31명의 명동 성당에서 구국 선언으로 김 대중. 함 세응 신부가 구속되었다.
74세인 신부님은 지금도 1년 넘게 해군기지 반대에 앞장서고 있다. 때로는 쇠사슬에 몸을 칭칭 감고 춥고 더운 계절에도 자리를떠나지 않고 있다.
문 규현 신부 역시 형님을 응원하기 위해 좌리를 튼적도 많다. 알다시피 동생은 북한을 여러번 방문했다. 그래서 인지 세계에서도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그러나 신분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있지 않다. 하지만 1989년 중앙 모 월간지에 신부님에 대한 시평을 읽은 적이 있다. 신부님은 전북 익산군 황동면에서 4남 3녀의 7남매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독실한 가정에서 성장한 그는 서울 성신 고교를 거쳐 광주 카돌릭 신대를 졸업했다. 1976년에는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뒤 전주. 완주 군산등 성당에서 보좌 및 주임 신부로 사목 일선에 종사했다.그후 전주 교구청 교육 국장으로 일을하시다 유학을 떠난것은 1987년도였다.
아일랜드의 꼴롬반 선교회의 초청에 의해서였다. 같은 해 메리놀 신학 대학에서 석사 과정을 밟기 시작 이듬해 영주권을 취득했다.
문 신부는 미국 유학중 메리놀회 베네로소 신부와 함께 1989년 북한을 방문하고 6월 하순 뉴욕에서 돌아왔다.
1차 방문에서 돌아온 신부는 귀국후 전국 각지를 돌며 방북 순회 공연회를 가질 예정이었고 그런 다음 아시아 인성회 총무로써 활동을 했다.
따라서 1989년 방북 이후 8차례 무단 방북하여 독재자 김 일성 시체 안치소를 방문 그 방명록에 김일성 수령 영생을 기원 한다는 글을 남겼다.
신부님은 학창 시절부터 매우 순하고 조용한 성품의 소유자로서 선 후배 동료간에 알려져 왔다. 그런 그가 사제가 된 후 보내온 사목적 자세는 평소 그의 성품을 익히 알던 사람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문 신부는 시골 성당에서 조용히 사목 자로써 지내는 것이 평소 꿈이였다고 한다. 그런데 유신 정권이 그로 하여금 현실 참여의 노선을 걷지 않을수 없게 만들었다고 말한바 있다.
특히 그는 둘째형 문 정현 에게 쏟아지는 정권의 탄압상을 보고 조용한 목자로 서만 지낼수 없다는 생각을 갖게 된것 같다. 75년에는 인혁당 사건의 연류자들을 위한 인권옹호에 투신 하다가 고초를 겪기도 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부천 경찰서 성고문 사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진상 규명에 앞장서서 활약 했다. 84년도 에는 카톨릭 농민회 전북 연합회 지도신부 85년에는 전북 민주화 운동 협의회공동 의장을 지내기도 했다.
이 시기에 오 승희 사건으로 투옥된 교사들의 석방과 그 이듬해 소 값 폭락을 항의하는 완주군 고산면 농민들의 소 몰이 시위사건 해결에도 앞장섰다.
이 시위에는 농민과 함께 십자가를 앞세우고 행진 하다가 경찰에 맞아 5일간 입원 한적도 있다.
그는 이 처럼 평소 민주화와 기층 민주들의 생존권에 남다른 열정을 갖고 일해왔다.
신부님은 어렵고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관대한 반면 자신에게는 무척 엄격 했다고 한다. 단적인 예로 사제관 식사는 김치를 포함해 세가지를 넘지 않도록 했다.
신문에 생활고로 자살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실리면 그 날은 식음을 전페하고 괴로워 했다고 한다.
신부님은 1차 방북시 평양 장충 성당에서 미사를 집전 했는데 미사가 끝났음에도 아쉬워 자리를 뜰 생각을 않고 제단을 계속 지켜보던 1백여 신자들의 모습을 잊을수가 없다고 주위 사람들에게 말하기도 했다.
이때의 경험에서 문 신부는 분단 현실의 아픔을 실감한것 같다. 세상에 가장 놀라게 한1989년 7월 1일 TV에 반영된 신부의 판문각 연설은 온 국민들에게 충격적으로 받아 들여 졌다.
사제단 측은 신부의 연설 전문을 읽어보면 문제 될것이 없다고 했다. 미국을 비판 하기보다 미 제국 주의를 비판 했다고 말하고 있으나 아무튼 사제로서는 생경한 느낌을 주었다는 여론이 비판을 받았다.
더욱이 그의 판문각 연설은 교회 평신도 협의회 회장단 성명에서도 유갑스러운 반응을 이르켯다.
나 역시 형제 신부님의 교회 지도자로써 머무는 것만은 아니라 생각한다 따라서 사회적. 도덕적. 윤리적. 정신적. 지주이라도 상징으로 인정되는 자기 중심적이고 과거 지향적이며 전진 하는 역사 방향과 맞지 않은 경우가 매우 무섭다.
그래서 잘된다는 질서가 어지럽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따지고 보면 70년대 그리고 현재 민중과 역사는 이데올르기에 절망과 소용돌이 속에서 강정해군 기지는 훗날역사에 선구자 행위 아니면 통일을 저해 행위 둘중에 하나로 기록 할것이다.
제주시 산림조합 이사 송순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