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초가을 들어서며 텃밭에 배추 모종을 심었다. 한동안 잘 자라는가 싶던 배추 잎이 어느 날 걸레가 되어있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초록색 애벌레가 배추 잎마다 착 붙어서 잎을 뜯어 먹고 푸른똥을 잔뜩 내어놓고 있었다. 애벌레 몸체가 어쩌면 그리도 배추 잎 색과 같은지 눈 부릅뜨고 살펴도 번 번히 놓칠 만큼 식별이 어려웠다. 그 초록색 애벌레는 노란 배추꽃이 필적에 노랑나비가 되어 배추 꽃 위에 앉는다. 애벌레도 나비도 보호색으로 치장을 하는 것이다. 온갖 생명이 변신을 연출하며 자신의 목숨을 지켜내려 애쓴다. 특히 카멜레온은 변신의 천재로 주변 환경에 즉시즉시 몸 색깔을 바꾼다. 바다의 문어 오징어도 순간순간 현란한 색의 마술을 부린다.
사람은 진실과 정직을 덕목으로 삼는 까닭에 속마음을 감추고 전혀 다른 표현을 하거나 허위나 과장으로 속이고자할 때 그 속과 겉이 다름을 일컬어 흔히 이중인격이라고 비하한다. 다중 인격이란 말도 쓴다. 하지만 평생 한 모습으로 산다는 건 불가능해 보인다. 엄밀하게는 이중인격이나 다중인격이 아닐 수도 있는지 모르겠다. 때와 장소, 대상에 따라 모습이 달라지는 것이 사람이다. 신성한 장소, 예를 들어 사찰이나 성당, 교회에서 거룩하던 사람도, 다른 곳에서 여일하게 거룩한가. 미운 사람과 좋은 사람 앞에서 같을 수가 없고, 화장실 들 때와 날 때가 다르다. 사람도 수시로 색깔과 태도를 바꾸며 산다. 눈높이라는 말이 설득력을 갖는 것은 대상에 따라 수위를 조절해야하는 소통의 기술을 강조하는 까닭이다. 생명체의 변신이란 어쩌면 신선하고 필수적인 생존 전략인 셈이다. 배우는 다양한 역할을 잘 소화해 내는 것으로 능력이 평가 된다. 변한다는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의도가 불온하여 세상이 시끄럽다. 정객들은 수시로 카멜레온의 모습을 보인다. 정가(政街)란 세속의 야심과 욕망이 집결하는 곳이다. 정치는 모든 제도 위에 군림하고 정치가는 그 권력의 정점에 존재하므로 그 곳에 오르고자 하는 사람이 언제나 넘친다. 그 치열한 경쟁에서 이기려면 변신의 기술이 뛰어나야만 할 터이다, 수시로 색깔을 바꾸는 정치가는 신뢰를 잃는다는 걸 알기 때문에 적절하게 유익을 챙기되 지조를 지키는 것처럼 보이는 일이 그들의 난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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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탐문회에서 경남지역 탐사에 나섰을 때, 영남대 교수분이 들려준 이야기이다. 퇴계선생께서 후처를 맞이했는데 그 여인이 명민하지 못했다고 전한다. 이 부인이 밤에 보는 남편의 모습과 제자들과 학당에 계시는 낮의 모습이 너무 달라서 강의중인 남편 곁으로 비실비실 다가와 옆구리를 건드리곤 했단다. 선생은 그런 아내를 다독이며 온화하게 물리치셨다고 했다. 선생뿐 아니라 밤과 낮의 모습은 누구나 다르다. 이 이야기가 재미있는 것은 성리학의 대가로 동양 3국을 떠 울렸던 분의 사생활을 잠시 엿보게 해서다.
생명 있는 모든 존재가 보호색을 사용하는 셈이다. 변화는 우주의 속성일까. 천지는 쉼 없이 변모하여 자연 자체가 수시로 같은 모습이 아니지만 그 소용돌이치는 변화 속에도 질서가 엄정하다.
녹색 배추애벌레가 노랑나비가 되듯이 그 오묘 무쌍한 바뀜은 목숨들의 본성일 것이다. 영원을 꿈꾸는 인간역시 또 얼마나 쉽게 그 마음이 변하는가. 계절도 쉼 없이 바뀌고 맹세는 허물어지고 약속은 파기되며 변절과 배신이 파도처럼 출렁이는 세상이다. 다시 한해를 맞으며 개인도 단체도 바람직한 변화를 시도하는 이야기로 들썩이고 있다.
“변화하는 이 땅에서 행복 하라”
태국 아잔 차 스님의 가르침을 만났다. 생의 표면에서 일고 잦는 변화를 이해하고 수용함으로써 심연의 평화에 이르기를 권하는 이 심장한 말씀이, 상처와 실망으로 번뇌하는 삶에 한 가닥 빛을 던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