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랍 30일 다락방에서 검은 가방을 정리 하던중 문득 누런 시멘트 봉투를 보았다. 60년도말 월급 봉투에는 희미한 펜글씨로 7천원이 적혀 있었다 .당시 물가를 가늠해보면 막걸리 한되 2십원. 콩나물 5원. 쌀한가마니 값이 3000여원 이였다고 기억하고 있다. 지금 까지 신주 같이 모셔둔 월급봉투 60년도 초만해도 봉투는 쓰임새가 달랐다. 하얀 백지 봉투는 고급용으로 상류층에 많이 사용하였으며 평소 서민들이 사용한 누런 시멘트 봉투가 전부 였다. 봉투를 만드는 일은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이 맡아 했다. 가용돈을 벌기 위해 종이를 접어 재단한후 100장 묶음을 구멍 가게에 넘겨주면 이 돈으로 담배와 술을 마시는데 필요한 자금 역할을 했다. 우리는 한평생 살면서 봉투와 긴 인연을 맺고 산다. 자녀가 태어나 첫돌이 되면 부귀 하도록 금반지 또는 돈 봉투를 주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면 선생님의 고마움을 봉투로 해결 하기도 했다. 결혼식에는 축의금이요, 직장 생활때는 상사에게 눈 도장을 찍는 수단도 봉투였다. 죽음에 이르러 저승길 편히 가시도록 노자 돈도 이 범주에 속한다. 동서고금을 통하여 봉투에 대한 사연은 우리 뿐만 아니다 삐딱한 눈으로 세상을 본 피어스의 악마 사전에 봉투를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봉투는 돈을 먹는 하마며 연애 편지가 입은 잠옷이라 했다. 프랑스 작가 프로벨도 이와 유사한 역설적인 사실을 쓰고 있는데 여기 에는 봉투는 염문이 관통이요 사랑을 거절 당하는 칼집이라 했다 봉투의 최초 뿌리는 고대 바빌론 시대에 사용 했던 것으로 고고학자 들은 보고 있다. 목판에 봉투모양을 만들어 흙을 구어 만든 것이다. 중국에서 종이가 발명되어 우리나라에 전해진 고려와 조선을 거치면서 비밀을 간직하는 봉투는 쓸모가 없었다. 임금에 간하는 상소문은 두루마리요 칙령이나 교지(敎旨)를 내릴적에도 한지 한 장으로 대신 했다. 그러나 봉투가 본격적으로 생겨난 것은 프랑스 루이14세 때 였다 .처음으로 사설 우편국을 만들어 쓰게 된 것이 시초다. 우리 역시 갑오경장 이전인 우정국이 생기면서 봉투를 사용했으며 지금처럼 규제가 생긴 것은 5.16 군사 정권 이후다 .이처럼 봉투는 표기된 비밀을 은패시키고 그 표기 물을 물리적으로 보호하는데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헌데 이 봉투가 우리들에게 특유한 금전과 야합이 이루어지고 있다. 과거 관리들은 돈은 액물이며 천물이라 했다. 기방에 가서도 술을 마시며 돈을 손으로 집는 법이없고 젓가락으로 집어 주었다. 어쩌다 조선 말기 관리들이 매관 매직 할때는 엽전 꾸러미를 자루속에 은폐시켜 주고 받았다. 지금은 봉투하면 돈을 연상하듯 일반화가 되었다. 봉급, 하사금, 금일봉. 촌지. 조의금. 축의금도 봉투를 숨겨서 준다. 이런 일은 인습과 폐습적 사고 방식에 젖은 선조들이 덕목(德目)으로 간주 하자 하지만 봉투에 숨겨진 수억 수천만 원의 수표와 현금은 사정 기관이 표적이 대상이 된다. 그래서 007가방, 골프채, 과일 박스에 숨겨진 돈 덩어리는 봉투 보다는 안전하다. 알다시피 과거 어느 정권이든 집권하면 초기에는 사정기관을 앞세워 광택나는 칼날을 휘두른다. 그러나 대통령 임기 말에는 정치가. 공무원. 심지어 대통령 친인척 비리 까지 등장하는게 오늘의 현실이다. 이것 저것 내미는 봉투는 거절할수없는 밀약인가? 봉투만이 그 진실을 알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