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희 가족은 초등학교 3학년 때 뉴질랜드로 이민을 갔습니다. 뉴질랜드에서 개방적인 삶을 살다보니 성격이 날이 갈수록 제멋대로고 나태해졌습니다. 고등학생 때부터는 부모님조차 어쩔 수 없을 정도로 정말 막(?) 나갔습니다.
그랬던 저에게 정말 친했던 유학생 친구 하나가 군대를 입대하게 되면서 문득 ‘대한민국 남자라면 다들 가는 군대를 외국 영주권이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국방의 의무를 다하지 않아도 되는 걸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한 부모님께 효도를 못해 죄송한 마음과 군 경험을 통해 조국과 제 자신을 찾고 싶다는 생각으로 입대를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고민 끝에 해병대를 지원했습니다. 해병이 되기로 결심한 가장 큰 이유는 사격, 공수훈련 등 다양한 훈련으로 강인한 체력과 정신력을 기르며, 유사시 조국과 가족을 지키는 최강의 부대라고 생각해서입니다.
그렇게 해병대 지원을 신청하고 2010년 11월 23일 부산에 있는 병무청을 가서 면접과 체력시험을 보고 집에 복귀하였는데 TV에서 충격적인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제가 면접을 보던 바로 그 순간, 북한과 가장 근접한 섬인 연평도에서는 북한의 도발로 무고한 주민과 해병들이 희생당했습니다. 저는 너무 어이가 없었고 끓어오르는 분노를 주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전쟁이 날 수 있다는 이유로 제가 지원했던 해병대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러한 상황에서도 굳은 각오를 가지고 저와 같은 생각으로 해병대 지원을 포기하지 않은 동기들이 너무 보고 싶었습니다.
유난히 추웠던 입대 당일. 포항에 70년 만에 폭설이 내렸습니다. 연평도 포격사건에도 불구하고 무려 600여명이 입대를 했습니다. 수 백명의 동기들을 보며 저는 대한민국의 젊은 청년으로서, 해병으로서 가슴 뜨겁게 자랑스러웠습니다.
그런 동기들과 7주간의 혹독한 추위와 고된 훈련을 견디며 제 가슴에 빨간 명찰을 다는 순간까지 힘들었지만 즐거웠고 끈끈한 전우애를 키웠습니다. 훈련이 끝나고 각 자 부임지로 떠나는 날. 동기들의 떠나는 뒷모습을 보며 뜨거운 눈물이 흘렀지만 훗날을 기약하며 우리는 발길을 돌렸습니다.
제가 배치 받은 곳은 해군제주방어사령부였습니다. 사실 저는 북한군이 눈에 보이는 최전방을 원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 제방사에 부임하고 약간은 실망스런 마음이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근무해본 제방사는 타 부대 해병이 받기 어려운 훈련들이 많았습니다. 여기서 저는 테러범들을 제압하기 위한 저격수 훈련, 대테러 초동조치 등 강한 훈련을 받으며 진정한 무적해병으로 거듭나고 있습니다.
또한 해군제주방어사령부 대테러 저격분대원으로서 북한의 특수부대 및 무장공비로부터 국가 중요시설과 국민들을 지킨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앞으로 제 목표는 더 강한 해병이 되기 위해 제방사에서 받을 수 있는 모든 훈련을 받고 전역하는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철부지 영주권자의 무적해병 거듭나기였습니다. 제 심장의 영주권은 언제나 대한민국이며, 제 매서운 두 눈은 언제나 적을 향해 타오를 것임을 다짐하며 저의 조금 특별한 군 생활 이야기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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