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뢰와 의심의 차이
신뢰와 의심의 차이
  • 김찬집
  • 승인 2011.12.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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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조금 과장된 표현일지 모르지만 이분법적으로 모든 사고를 한다. 애국과 매국, 상식과 비상식,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 신뢰와 의심 등의 이분법적인 단어가 정치인의 말을 통해 매스컴을 장식하고 있는 요즘이다. 한·미 FTA 협정이  국회인준 전에는, FTA를 찬성하면 ‘매국(賣國)’ 반대하면 ‘구국(救國)’이라는 흑백적인 이분법으로 갈라놓는 말로 국민들을 당혹스럽게 했다. 진실 앞에 정직하다면 ‘매국이냐, 애국이냐’가 아니라 ‘쇄국이냐, 개국이냐’라고 주장한다면 그래도 말이 되는데 말이다. ‘비상식과 상식’이라는 구분도 너무나 정해 놓은 규격대로 갈라놓는 꼴이다. 양쪽모두100% 완전한 상식·비상식자는 없다. 
또 요즘에 좌우개념에서도 듣기 거북한 용어들이 새로 생산되고 있다. 수구보수꼴통? 강남좌파? 등등 완전히 양쪽으로 갈라놓고 편짜기를 하는 추세다. 좌파와 우파의 개념은 프랑스혁명당시 혁명의회에서 의장석을 중심으로 왼쪽이 급 진보적인 ‘자코뱅당’ 오른쪽 온건한 보수의 ‘자롱드당’의원들이 앉아 있던 데서 비롯된 것이다. 이렇게 좌파와 우파가 시작되었지만, 우리사회에서는 짧은 다리는 길게, 긴 다리는 짧게 만들었던, 이른바 융통성이 전혀 없다는 의미로 자주 쓰는 그리스 전설에 나오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를 방불케 할 만큼 더 굳어진 이분법이다. 완전 보수가 없고 완전진보는 없다. 어느 쪽이 조금 크고 어느 쪽이 조금 작은 것이 우리들의 삶이고 좌·우 가치다.
이와 같이 우리들의 삶이란 게 한 없이 섬세한데 왜 좌와 우밖에 없을까? 지금이야말로 융통성의 질에 따라 좌·우가 아닌 도리를 말해야한다. 지금 정치권에서 일어나는 좌·우의 다툼은 홉사‘팽이치기’게임이다. 팽이치기를 해본사람은 안다. 땅에서 팽이를 돌려, 남의 팽이와 부딪쳐 누구의 팽이가 먼저 스러지느냐 하는 식으로 승패를 가름하는 것과 같다. 좌·와 우의 대립은 신뢰보다도 불신이다. 한쪽의 주장을 의심하기 보다는 불신(不信)에 가깝다. 
의심과 신뢰라는 가치에는 많은 장점이 있다. 정치나 경제는 신뢰가 예측가능성, 공동체의 안전성, 모든 프로젝트들을 순탄하게 운영될 수 있다. 신뢰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미국의 정치 철학자 ‘프랜시스후쿠야마’는 그의 저서“역사의 종언”에서 신뢰 없이는 인류번영은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신뢰를 예찬하는 철학자도 있는 반면 영국의 철학자 ‘프랜시스베이컨’은 “신뢰의 끝은 의심, 의심의 끝은 신뢰라고 단언 했다. 세계적인 문학의 거성 괴테는 ‘의심은 지식과 함께 성장하며 힘의 발로’라고 했다. 의심에는 힘이 있다. 의심과 신뢰는 오십 보, 백보라는 말이다. 의심과 불신은 비슷하게 보이지만 엄연히 다른 것이다. 의심은 신뢰와 불신 사이에 있는 중용·중도 정도다. 의심에는 신뢰와 불신이 섞여있다. 건강한 의심, 합리적인 의심, 이유 있는 의심은 맹목적인 신뢰와 불신을 동시에 견제한다.
의심이 합리적이고 건강하려면 객관성, 독자성을 확보해야한다.
현대 사회에서 의심은 민주주의와 과학과 결합돼 있다고 한다. 의심은 정치와 과학이 끊임없이 발전하고 혁신 할 수 있는 도구라는 의미다. 과학에서는 아무리 확고히 자리 잡은 석학의 학설이라도 의심으로 무장된 보통과학자. 또는 보통사람들이 허물어뜨리는 경우를 적지 않게 접하는 세상이다.
의심은 그자체로서 궁극적으로는 신뢰와 결합될 때 그 힘이 배가 된다. 의심은 더 큰 신뢰와 진리를 낳기 위한 중간단계가 될 수 있다. 영원히 의심만 할 수는 없다. 의심에서는 행동이 나오기 힘들다. 행동은 신뢰에서 나온다. 의심은 신뢰를 보완 할 수 있지만 대체 할 수는 없다. 불교, 기독교에서도 의심은 어느 정도 용인하지만 의심을 궁극에 이르는 과정으로 이해하는 경우들을 본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은 의회비준은 통과 했지만 앞으로 효과에 대해 신뢰하는 사람들과 의심하는 사람들과 불신하는 사람들이 연일 시위를 하고 있다. 이런 프로젝트에 대해 신뢰와 의심이 존재하는 것이 더 타당 할 수도 있다. 역사는 불신, 의심, 신뢰라는  물방울이 끊임없이 서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발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세계역사는 불신에서 혁명이 나오고, 의심애서 개량이 나오고, 신뢰에서 안정을 유지한 기록의 세계사다. 우리들의 민주주의, 시장경제도 의심을 넘어 신뢰의 터미널로 방향을 틀어야 한다.
존케네스 갤브레이스가 ‘불학실성의 시대(The Age of Uncertainty)'를 선언한지도 반세기가 되고 있다. 확실성의 시대는 신뢰의 시대이며, 불확실성 시대는 의심의 시대다. 의심의 시대는 신뢰로 가는 전 단계 시대다. 불신의 시대는 아니다.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는 최고의 행복한 체제 일뿐 아니라 지금 건재하다. 지금의 부(富)의양극화는 신뢰, 의심의 대상이지 불신의 대상은 아니다.  한 조직의 경쟁력은 한 사회의 신뢰뿐 아니라
건강하고 합리적인 의심으로 결판난다고도 할 수 있다. 건강하고 합리적인 조직은 독자성을 확보하고 불신이 아니라 신뢰와 유기적으로 연결된 의심의 만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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