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시인이다’
‘나는 시인이다’
  • 김관후
  • 승인 2011.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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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곧 국가라는 전제적 사고방식은 민주주의에 역행하는 것이며 반정부는 반국가가 아니다. 민주국가의 국민은 국가를 위하여 정부에 수시로 요망사항을 제시하며 정부의 실정 (失政)을 비판하여 시정을 촉구하고 나아가서는 정부의 퇴진까지 주장할 수 있다는 데에 민주체제의 발전적 생명이 있는 것이다.”
1974년 초 긴급조치 1, 2, 3, 4호로 시작된 박정희의 철권 폭압통치가 계속되었다. 그해 11월 27일 각계 원로 71명은 그 유명한 민주회복국민선언에 서명하였다. 그해 12월 민주회복 국민선언에 참여했던 백낙청은 ‘교육공무원법 위반’이란 구실로 서울대 교수직에서 파면되었다. 국민선언 참가자 명단에는 이헌구 김정한 박연희 김규동 백낙청 고은 김윤수 김병걸 홍사중 등 문인들의 이름도 보였다.
 “부르세/아리랑…/6·25에 희생된/형제자매/지리산/제주도/광주/그 모든/항쟁의 대열에서/숨 거둔/우리 형제자매/원혼이여/구름을 넘어/달을 넘어/원한을 넘어/부르세/아리랑……/한 목소리로/노래 부르며 가세/흰 뼈/이 산하/어디서나 일어서서/하나되는 위대한 나라 기려/부르세/한 목소리로/아,아리랑을”(‘아리랑’ 전문)
2001년 1월 말이다. 한국문단의 원로 김규동 시인이 오랜 세월 기다리고 기다리던 통일 염원과 분단의 아픔을 나무판 위에 한 자 한자 새겨넣은 시각과 서각 작품을 모아 전시회를 열었다. ‘희망’ ‘남과 북’ ‘38선’ ‘세월’ ‘그래도 저이는 행복하여라’ ‘안부’ ‘오 통일’ 등 100점의 서각과 시각 작품에는 망향가와 통일의 희망을 담은 통일가가 뼛속 사무치게 새겨있다. 또 김기림 임화 오장환 이상 등 남과 북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해방공간의 시인과 작가들의 작품을 새겨넣어 진혼하였다.
김규동 시인이 지난 9월 28일 오후 2시50분 폐렴과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6세. 1970년대 중반부터 민주화운동에 참여하면서 현실에 대한 비판과 통일의 염원을 담은 시들을 창작하기 시작한 시인. 고인은 1974년에 백낙청, 김정한, 고은 등과 함께 자유실천문인협의회의 창립을 주도했다. 이어서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민족문학작가회의 고문 등을 역임하면서 민족문학 진영을 이끌었다. 분단 현실과 노동, 인권 등 사회적 문제에 예민하게 반응하면서 민중적 역사의식을 순정하고 진솔한 언어로 보여주는 다수의 시를 창작하면서 참여문학 진영의 대표적인 시인으로 활약하였다.
 “금은 그어졌으나/모두가/우리 땅이라/우리 하늘이라/땅과 하늘을/더 이상 파괴하지 말고/사랑하자/산천과 사람/이름없는 벌레에 이르기까지/형제의 정을 되찾자/이것이 살아남는 길이라/함께 살아남는 길이라”(‘남과 북’전문)
1925년 함경북도 종성에서 태어난 김규동 시인은 1948년 김일성종합대학을 중퇴하고 38선 이남으로 내려왔다. 1970년대에는 민주화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현실비판적인 시를 주로 썼다. 그는 '나비와 광장' '죽음 속의 영웅' '오늘밤 기러기떼는' '길은 멀어도' '느릅나무에게' 등 시집 9권을 비롯해 '새로운 시론' 등 평론집과 '지폐와 피아노' 등 산문집을 펴냈다. 지난 3월에는 자전에세이 '나는 시인이다'를 출간했다.
고인은 자서전에서 "소원이 있다면 세상 떠나기 전 꿈속에서처럼 고향 땅 함경북도 종성에 한번 다녀오고 싶습니다"라며 고향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을 전하며 "시인임을 자처했으나 영혼을 뒤흔든 아름다운 시 한 편 출산하지 못했음은 순전히 김 아무개의 책임"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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