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29~1398)이었다. 목화가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오기 전까지 일반 백성들은 칡뿌리나 닥나무로 만든 옷으로 한겨울을 견뎌야 했다. 의복이래야 명주나 마직 밖에 없었다. 비단이나 가죽옷이 귀족들이 전유물이었던 시절, 서민들은 변변한 이불도 없이 맨흙바닥에 잠자리를 깔고 지냈다. 그러나 문익점이 가져온 목화씨가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백성들은 목화솜을 넣은 따뜻한 이불을 덮을 수 있게 됐고 누런 베옷을 벗고 흰옷을 입었다. 옷을 더럽히지 않을려고 방에 도배를 하기 시작했으며 이불과 옷을 보관하기 위해 장롱 등 가구를 만들었다. 가히 의생활과 주생활에 혁명적인 변화였다.
공민왕때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문익점은 역모사건에 휘말려 3년간 교지국
(지금의 베트남)에서 귀양살이를 한뒤 귀국하지만 곧바로 파직당한다.
문익점은 귀국할 때 몰래 목화씨 10알을 간직한채 고향으로 내려갔다. 당시 원나라는 고려에 면포를 독점 수출해 엄청난 이익을 보고 있었기 때문에 씨앗의 반출이 엄격히 통제돼 있었다. 문익점은 검열을 피하기 위해 씨앗을 붓뚜껑에 숨겨와 고향의 텃밭에서 남방에서 가져온 씨앗을 뿌릴 수 있었다.
목화씨가 처음 뿌려진 곳은 경상남도 산청군 단청면 사월리 160번지 일대, 진주 남강의 상류인 경호강과 지리산 자락이 만나는 고즈녁한 마을 어귀에 있다.
인도가 원산지인 목화는 본래 추위에 약해, 문익점이 뿌린 씨앗중 기후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말라 죽었다. 다행히 마지막 한알에서 싹이 나와 300여개의 씨앗을 얻을 수 있었다. 목화씨는 이웃 마을로 급속히 전파됐고 경상도 충청도, 전라도 삼남으로 널리 퍼졌다. 고려시대까지 수입품이었던 면포는 조선시대 들어 최대 수출품으로 바뀌었다. 성종때는 일본에서 수입해간 면포만도 연간 50만필에 달했을 정도로 최고의 사치품이었다. 명나라와 여진족도 결이 고운 조선 면포를 최고로 쳤다.
무려 640여전인 전설같은 이야기다.
그뒤 문익점이 손자인 문래가 고안해 “문래 → 문레”가 되었으며 역시 손자인 문영이 최초로 베를 짰다하여 “문영베 → 문명베” 가 되었다고 한다.
이로 인하여 겨울철에 큰일이 없었던 아낙네들도 집집마다 물래를 돌려 실을 뽑아냈다. 봄에 씨앗을 뿌려 가을에 수확하는 목화는 농한기인 겨울철의 유휴노동력을 이용하는데도 안성 맟춤이었다.
이러한 변화는 19세기 일제에 의해 서양 면직물이 들어 올때까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가내수공업이었다. 세종때 이르러 정부의 강력한 목면업 장려정책에 힘입어 이북지역인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까지 한반도 전역에서 재배되면서 생활문화 전반에 질적 향상과 백성들의 생활이 완전히 바꿨으며 우리 민족의 대표직물로 자리잡았다.
문익점이 조그만 관심과 도전이 백성들의 생활에 일대혁명을 가져오듯 우리도 주위에 있는 모든 것들에 관심과 가져보면 어떨까. 싫든 좋든 개인 의지와는 무관하게 스마트한 세상에 살아가는 우리들. 밀려오는 중국관광객, 외국인 관광객 200만명 유치, 세계7대 자연경관 도전 등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너무도 많다. 목화씨가 일으킨 큰 변화도 작은씨에서 부터 시작되었다, 내 주변을 한번 둘러
보며 관심을 가져보자, 그리고 도전과 개척정신으로 헤쳐 나가보자!
저작권자 © 제주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