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더 나은 세상 보고싶은 것
“나에게는 절실한 한 가지 소원이 있다. 그것은 내가 이 세상에 살았기 때문에 세상이 조금 더 나아졌다는 것이 확인 될 때까지 살고 싶은 것이다.”
‘아브라함 링컨’의 소원이 ‘좀 더 나은 세상을 보고 싶은 것’이었듯이 누구에게나 소원은 있게 마련이다.
개인을 위한 것이든 공동체를 위한 것이든 소원을 갖는다는 것은 희망을 엮는 기쁨이다. 그것은 설레며 기다리는 아름다운 꿈이기도 하다.
새해를 맞으면 많은 사람들이 소원을 빈다. 희망을 엮고 황홀한 미래를 꿈꾼다.
그래서 새해가 우리에게 주는 유일한 선물은 ‘아름다운 꿈을 마음대로 꿀 수 있고 소원성취를 빌 수 있는 특권’이라는 말도 있다.
2005년이라해서 예외 일수가 없다. 2004년엔 2004년의 소원이 있었듯이 을유년(乙酉年) 새해 역시 나름대로 성취를 바라는 소원이 있다.
그렇다면 이 땅에 사는 많은 사람들의 새해 소망은 무엇일까.
매체를 통해 전해지는 대부분의 소원은 “잘 살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경제가 되살아 나는 것”이라 했다.
잘 먹고 편안하게 살게 해 달라
백성들의 입장에서야 ‘잘 먹고 편안하게 잘 사는 것’ 이상의 소원이 어디 있겠는가.
이 같은 소원은 궁핍한 경제적 현실의 투영이다. 여기에는 경제를 제대로 돌보지 않는 나라 살림에 대한 절망이 농축돼 있다.
이런 의미에서 최근 2∼3년 사이 신년 덕담(德談)이 “복 많이 받으세요” “건강하세요”에서 “부자 되세요” “돈 많이 버세요”로 바뀌고 있는 것은 시사하는바가 크다.
물론 세상을 지배하는 ‘돈의 위력’을 반영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노무현 정부의 불안한 경제정책에 대한 백성들의 불만과 원망이 서려 있다. 그래서 집권세력과 정치권을 향하는 백성들의 가슴엔 빙점(氷點)이하의 냉기만 싸늘하게 흐르고 있는 것이다.
여러 다양한 가치들을 아울러서 더불어 사는 길을 닦아 공동선을 쌓기보다는 패거리를 만들어 싸움질이나 하고 갈등과 분열만 부채질하는 설익은 실험용 개혁 행진이 내수를 얼어붙게 하고 청년 실업자가 넘쳐나며 생계형 자살자가 속출하는 경제 상황까지 몰고 간 것이 아닌가.
오죽해야 대학교수들이 2004년 우리나라의 정치겙姸쫨사회 현상을 “패거리 지어 다른 사람을 공격한다”는 당동벌이(黨同伐異)라는 사자성어로 꼬집었겠는가.
남을 아우르는 포용력 있어야
그렇기 때문에 2005년 새해 벽두 국가지도자에게 보내는 주문은 각별해지지 않을 수 없다.
지도자는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희망을 제시하여 백성들의 잠재역량을 결집 시킬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지도자의 리더십이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패거리 문화를 청산해야 한다. 남을 인정하고 한아름으로 아우르는 포용력이 있어야 한다.
“실패의 경험에서 교훈을 얻지 못한다면 국가는 정체되고 정체된 사회는 미래가 없다”는 사회 발전 이론을 가슴에 새겨 곱씹어야 할 것이다.
“참여정부 집권 전반기 2년 국정운영은 실패했다”는 일각의 평가를 긍정한다면 더욱 그래야 한다.
나라 살림의 긍극적 목적은 부(富)의 재분배를 통한 사회복지와 인간다운 삶의 실현에 있다. 기초적이고 교과서적인 복지 이론이 그렇다.
그러나 이는 경제 활성화의 여력으로 실현되는 것이지 섣부른 개혁의 담론만으로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뜨겁게 경제의 불을 지피고 보다 많이 빵을 구워내야 한다. 그런 연후에 빵을 나누어 먹는 것이 시장경제 체제의 사회복지 창출이다.
이것이 “무엇보다 경제가 우선”이라는 백성들의 새해 소원이다.
이를 모른 채 지난해와 같은 혼탁과 갈등이 부추긴다면 이는 백성을 깔보고 국민통합의 의무를 다하지 못한 정부의 직무유기가 될 것이다.
그래서 대통령에게 보내는 주문은 또 있다.
제발 올해는 “세구거이(細口巨耳)하고 저수하심(低首下心) 하시라”는 것이다. “적게 말하고 많이 들으며 머리와 마음을 낮추어 백성에게 다가서라”는 뜻이다.
벌써 새해가 시작 된지 일주일이나 지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