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교와 힌두교의 발상지는 모두 인도다. 인터넷을 뒤지다가 현대힌두교 <한글파일>에서 힌두교의 무소유 삼(三)법칙이 불교 삼욕(三欲)과 대동소이한 것을 처음 알았다.
우선 불교의 무소유를 현대적의미로 생각해보면 세 가지 욕망을 비우라는 말이다. 이 세 가지 욕망은 마르크스의 물욕(物慾)과 프리드리히 니체의 명예욕(名譽慾), 그리고 프로이드의 성욕(性慾)이다. 이런 인간의 본능을 불교에서는 삼욕(三欲)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힌두교에서도 소유와 무소유를 구분하는 기준을 3가지를 든다. 돈, 여자(남자), 집(주택)이다. 이 3가지가 없으면 무소유라고 간주한다. 이를 “사두”라하며 3가지 모든 것을 길에서 해결한다고 한다.
볍정스님의 말을 빌리면 무소유한 삶은 자신을 늘 뒤집어보고 자연의 질서에 따르는 삶이라고 했다. 고구마 하나까지도 법정스님의 거처인 오두막 근처에 내려오는 산 짐승들과 나누어 먹는 삶, 자신의 아무것도 갖지 않아야 온 세상을 차지 할 수 있으며, 자신의 무엇인가를 가졌다고 하면 크건 작건 그것이 노예가 된다는 것이다.
인간을 제외한 모든 동물은 자기 자신과 남을 비교하지 않고 자기 특성을 마음 것 드러내면서 생의 섭리를 마친다. 타자와 비교는 시샘과 열등감의 원천이다.
나뭇잎도 싸우지 않는다. 거름 기운을 더 받으려고 또는 햇볕을 더 차지하려고 서로 싸우지 않는다. 가을이 되면 미련 없이 떨어져서 어머니 나무를 위한 거름으로 썩는다. 나무에도 죽음이 있다. 그러나 개체의 죽음을 반사(半死)의 끝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죽은 자리에서 또 나무가 난다. 이런 현상을 불교의 윤회설과 같은 맥락이라면 잘못된 생각일까?
불교반야심경의 이르는 대로라면 물질들의 집합인 색(色)은 겉으로 드러난 모습을 띠지만 모습을 띤 형체만으로는 너무 허망하기 때문에, 그 진리를 찾아 애쓰고, 그러다 보면 색을 보되 색을 이루는 대로 구성된 공(空)까지 알게 되니, 바로 색즉시공(色卽是空)이고. 반대로 공의 성질이 물질색의 본바탕이므로 또한 공즉시색(空卽是色)이라는 의미라면 잘못된 생각일까? 무소유는 소유의 원인이 되는 욕심을 접으라는 교리다. 불가에서 말하는 맑은 가난은 넘치는 부보다 훨씬 값어치 있는 지혜로운 삶을 신도들에게 권한다.
무소유로 한 마음이 청정하면 온 법계가 청정해 진다는 것은 불법이다. 그러나 욕심을 비운다는 것이 말로는 쉽지만 실질적으로 인간의 원초적 본능을 접으라는 말이다. 이것은 보통사람에게는 정말 어려운 일이다. 이런 경지에 이르는 것을 불교경구로 해탈(解脫이)라고 한다.
해탈은 고뇌의 속박에서 해방되어 청정한 영혼을 의미한다. 사바세계라는 욕심의 경쟁사회에서 불가의 청정한 영혼은 우리사회의 버팀목 이다. 삶을 맑게 하는 것만은 분명하다. 한 송이 연꽃이 피어나면 수천 만 송이 연꽃이 피어난다는 불교의 교리가 있다.
또 다른 방향에서 힌두교의 무소유자료를 보면 무소유중심은 ‘사두’라고 한다. 힌두교의 수행자를 가리켜 ‘사두’라고 부른다, 말하자면 힌두교의 성직자다. 사두가 되려면 일단 사두학교를 나와야 한다. 학교과정이 보통 4-6년 정도는 된다는 것이다. 이 기간에 온갖 분야에 대한 공부를 한다. 점성학, 심리학, 민속의학, 수학, 철학, 천문학 등을 공부한다. 사두 학교를 졸업하면 그다음에 기다리는 코스는 천하를 유랑하는 과정이 전부다.
‘일체의 모든 것이 자신에게 스승이다’라는 것이 힌두교의 교리이다. 사두는 죽을 때까지 세상을 돌아다닌다. 단 무소유(無所有)상태로 유랑하는 것이다.
사두는 머리와 수염을 깍지 않는 봉두난발(蓬頭亂髮)차림이다. 몸에다가 옷을 걸치지 않는다. 아랫도리는 전부 내놓고 다니면 좀 뭐하니까, ‘롱기’라고 부르는 기저귀 비슷한 것만 하나 걸치고 다닌다. 휴대품은 두 가지다. 하나는 스테인리스(구리 비슷한 강철)로 된 깡통이다. 불교의 발우와 같은 기능을 하는 깡통이다. 이 깡통하나로 차도 끊여 먹고, 수프도 끓여먹고, 세수도하고, 모욕도 해결한다.
만사형통 깡통이다. 또 하나의 휴대품은 삼지창(첨단의 세 개로 나뉜 무기이다. 2m크기다. 사두라는 징표는 이 삼지창이다. 삼지창은 시바(파괴의 신, 창조의 신, 유지의 신)를 상징한다. 삼위일체의 신학이다.
사두들은 “존재계가 나를 끊임없이 보살피고 있다.”는 철저한 신념을 가지고 세상을 돌아다닌다. 먹는 것과 잠자는 것에 대한 걱정을 하면 돌아다닐 수가 없다. 그 대신 기술을 가지고 있다. 첫째는 요가, 둘째는 호흡, 셋째는 무술이다. 하루에 1시간정도는 반드시 요가를 하여 몸의 건강을 유지한다. 요가는 길바닥에서도 할 수 있다. 무술도 익힌다. 유사시에 자기를 보호하는 수단이 된다. 사두가 롱기를 찬 모습으로, 삼지창과 깡통을 들고 동네어귀에 무심코 앉아 있으면 사람들이 먹을 것을 가져다주는 것이 힌두교 신자들의 관습이다. 지금 우리들은 ‘돈 놓고 돈 먹기’의 저축은행금융대란 쓰나미가 서민들을 울리고 있다. 과연 어떻게 사는 것이 잘사는 것인지 한번쯤은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삶의 우리 범인들의 삶인지도 모른다.
수필가 김 찬 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