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관 한편에 매실 액이 가득담긴 유리병을 옮기려다 쨍그렁 병을 깬 날도 그의 친구부부가 오기로 된 날이었다. 뒷정리를 하던 남편의 실수였다.
손님을 초대하면 음식을 준비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집안 구석구석을 쓸고 닦고 정돈하는 일이 우선이다. 집은 넓지 않은 데 잡동사니가 많아 손님에게 잘 보이려는 열의가 넘치는 남편의 눈치를 봐가며 청소를 하고나면 이미 진이 빠져서 음식은 뒷전으로 밀린다.
“아이구, 저런 그냥 놔두면 어때서 그 야단이요.”
콸콸 흘러내리는 누런 매실 액을 보는 순간 노여움이 가슴을 치며 올라왔다. 그 아까운 무공해 음료를 속절없이 흘려보내다니, 그걸 담그느라 힘들었던 수고가 떠올라 기가 막혔다. 마당에 한 구루 노목이 된 나무에서 금년은 유난히 많은 열매가 달렸는데 높은 가지에서 매실을 따는 일은 쉽지 않았다. 사나흘 힘들게 작업을 해서 그 작은 열매꼭지를 다 다듬고 씻어 비싼 유기농 설탕으로 정성을 다해 담갔었다. 울분이 삭지 않아 음식 만들던 손을 놓았다. 잠시 침묵하며 쏟아져 나오려는 비난의 말을 삼켰다. 이미 엎지른 물인데 더 무슨 처방이 있겠는가.
깊은 숨을 내리쉬며 생각하니 미리 안전한 곳으로 옮겨놓지 않은 내 잘못이구나 하는 자책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상대를 용서하기는 어려워도 자기를 용서하는 일은 얼마나 쉬운가, ‘사람이 죽고도 사는 데 이만한 일쯤이야’ 마음을 추스르고 무사히 손님접대를 마칠 수 있었다.
언젠가 밤중에 비닐하우스에 떨어지는 요란스러운 빗소리를 들었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는 한결같은데 그 비가 어디에 떨어지는가에 따라 소리의 차이가 엄청 다르다는 것을 생각했다. 시멘트 바닥에선 튕겨 오르고 양철지붕에선 천지가 무너지듯 요란한데 부드러운 흙에 닿을 때는 소리 없이 조용하다. 사건자체의 대소차이가 있더라도 어떤 태도를 취할지는 당사자의 결정에 다라 다르게 된다.
날마다 일어나는 소소한 일들을 대응하고 처리해 가는 방식에 따라 인생이 갈리는 지도 모른다.
외부의 자극을 통제할 능력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지만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지는 개개인의 선택인 것이다. 미국의 심리학자 베리 슈워츠(Barry Schwartz)는 <선택의 심리학>이라는 그의 저서에서 이 문제를 심도 있게 다루고 있었다.
반응의 문제는 삶의 키워드가 될 듯하다. 화를 즉각 표출시키지 않는 것, 사건과 반응 사이에 시간차를 두라는 가르침이 설득력을 갖는 것은 실수를 줄이는 확실한 방도인 까닭이다.
인간은 선택하는 존재이며 그 선택에 책임을 지고서 결코 가볍게 살아 갈 수없는 존재인 듯하다.
수필가 공 옥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