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자는 오래 살아야 한다. 통계에 의하면 혼자 사는 남자보다 아내와 함께 사는 남자가 평균 수명이 더 길다고 한다.
아내가 남편을 잘 보살피기 때문도 아니고 섹스를 의무방어전처럼 해서도 아니고 아내가 옷을 잘 세탁해 주어서도 아니다. 사 먹는 음식에 마구 들어가는 설탕이나 향료, 싸구려 기름을 듬뿍 친 그런 요리가 아닌, 아내의 손맛에 우러나오는 음식도 수명을 늘려주긴 하지만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잘 살고 싶어 못살게 구는 잔소리부터 과다한 임무수행을 요구하는 비인간적인 계약에 의해서 남자는 제 수명을 채우게 된다.
생선회를 파는 사람은 활어라야 고가로 팔 수 있음을 안다. 죽은 넙치가 만원이라면 산 넙치는 이만 원이다. 그래서 활어수족관에 어린 상어 한 마리를 풀어 놓으면 된다.
상어한테 먹히지 않으려고 죽을힘을 다하도록 피해 다닌다. 긴장상태의 물고기는 죽지 않고 오래 살아남는 것이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다. 평범한 아내인데도 감시의 눈초리를 보내면 남편은 눈치껏 움직여야 하고 긴장을 해야 한다. 여기서 평범한 아내는 남의 아내처럼 잔소리가 지독한 아내를 일컫는다.
겉으로는 잘 들어나지 않지만 어떤 남편도 아내 때문에 긴장한다. 마주 오는 여자가 팔등신 미인일 때도 긴장하니까. 긴장은 활력을 유발하므로 항상 움직일 태세가 되어 있어 운동량도 많아지고 잠도 잘 온다. 허나 그 잠이 늦잠인 경우는 다시 긴장할 태세를 갖추어야 한다.
게으름을 피우거나, 술을 많이 먹거나 이웃집 여자에게 친절하거나, 감기도 제 마음대로 걸려서는 안 되는, 여하튼 일거수일투족에 조심해도 아내의 잔소리는 퍼부어진다. 잔소리가 죽기보다 싫어서 남편은 긴장하고 반응하여 가족을 벌어 먹여야 하는 사명감에 불타기에 불붙은 장작처럼 늠름해지는 것이다. 입에 쓴 약이 보약이듯 기꺼이 악역을 맡아준 아내에게 감사해야 하며 절대 복종으로 충성하려면 철두철미 긴장해야 한다.
산을 오르던 젊은 여인이 자일을 몸에 감고 암벽을 오르다가 그만 줄을 놓치고 계곡으로 굴러 떨어졌다. 사람 살려달라는 소리에 등산을 하고 있던 남자가 그곳으로 급히 찾아갔다. 어느 정도 의식이 가물거리는지 이미 반눈만 떠 있고 머리가 깨져 얼굴에 피가 낭자하다. 위급한 상황임을 감지하고 핸드폰으로 119에 구조신호를 보내고 나서 여인의 머리를 지혈하려고 상의를 벗고 내의로 여인의 머리를 싸매려고 다가섰더니 여인의 입이 남자의 젖가슴 깨에 닿았다. 그 와중에도 여인은 고개를 비틀었다.
여인의 몸을 조인 청바지를 벗기려고 하복부에 손을 집어넣으려는 순간, 여인은 눈을 번쩍 뜨더니 온몸을 마구 흔들며 반항을 하였다. 어처구니없는 오해에 난감한 남자는 엉뚱한 생각이 번개처럼 번쩍거려 강간을 하려는 수작으로 여인의 브래지어를 벗기려는 행위를 하였더니 여인이 한사코 반항을 하며 악착같이 정신을 차리는 거였다. 실랑이 사이에 구조대가 와서, 무사히 구조되었지만 별 다른 손익이 없다. 하지만 남자는 한 순간이나마 날씬한 꽃사슴을 잘 뛰게 진화시킨 음흉한 표범의 표상을 멋지게 연출한 것이다.
사랑하는 여인이 환갑이 될 때까지는 살아줘야 남자는 기본 수명을 받는 거다. 나이트클럽에서 물 흐린다는 말을 들을 만큼 최소한의 기본 말이다.
환갑을 맞이하면서 여인의 입가에도 주름살이 생긴다. 입가까지 주름살이 생기면 천하의 여인도 미인의 반열에서 내려서야 한다. 입가의 주름살은 또 다른 입의 늙음을 암시한다.
사랑하는 여인이 입가에 주름이 잡히기 전에 세상을 뜨면 사랑을 잃은 여인은 사랑의 빈자리만큼 다른 입에도 힘껏 주름을 잡고 싶은 골똘함에 허기는 심각해진다.
짝 잃은 암컷 고양이는 새로운 짝을 찾아 헤매다가 종국에는 가로등이 졸고 있는 거리를 방황하게 된다. 지치면 사방팔방으로 튈 수 있는 정차된 차 밑에 웅크리고 고독을 핥게 되는 것이다.
다시 남자를 만나면 원초적인 미지의 주름살로 맞이하겠다는 심정은 아직도 살아있는 활어 같이 싱싱한, 어쩌면 즉석 불고기 같은 눈웃음, 원고가 반송될까 걱정되어 눈웃음 뒤에 감기는 신음소리 정도로만 각색하였지만 나 아닌 다른 남자의 밑에서 붉은 노을처럼 깔린다는 생각만으로도 틀니가 튀어나올 지경이기에 늙어도 남자는 오래 살아야 한다. 부지런히 늙어야 그나마 아쉬움 달래면서 산에서 영영 쉴 수 있으니까.
시인·문화관광해설사 고 훈 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