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夏節)산행, 사유(思惟)산행
여름(夏節)산행, 사유(思惟)산행
  • 김 찬 집
  • 승인 2011.07.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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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렬(炸裂)하는 태양이 대지를 달구었던 지난 일요일에 내가 속한 동아리 멤버로 오름을 올랐다. 징검다리 장마 무더위가 조금만 걸어도 온몸이 땀투성이다. 태양열로 지칠 대로 지친 영실등산로에서 무의식적으로 앞에 가는 다른 팀을 미치기 위해 숨차게 오르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앞에 가는 사람을 따라 잡을 필요가 조금도 없는데도 앞에 가는 다른 등산객에게 떨어지면 안 된다는 조급한 생각을 나도 모르게 해진 것이다.
이게 이제까지 내가 살아온 내 삶의 압축판 일 수 있다. 물론 나의 과장된 생각인지도 모르지만 천천히 가면 쓰러지는 줄 알고 살아온 우리들이다.
부단히 움직이지 않으면 쓰러질 것 같은 불안감, 조바심에 떨며 살아온 것은 나뿐이 아니라 우리세대 모두가 대동소이 할 것이다. 뭐를 했다하면 1등을 해야 남들이 알아주고 밥값을 할 수 있고 생각했다. 우리는 금메달은 알아주지만 은메달, 동메달은 알아주지 않는다.
이렇게 숨 가쁘게 달려가야 살아남는다는 조바심은 내가 앞에 가는 등산객을 무작정 따라 잡으려는 불필요한 노력과 같이 우리는 여러 면에서 부작을 겪고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너무 투쟁적으로 변해 버렸다는 말이다.
그러잖아도 우리들의 환경은 남북으로 분단되고 이념적으로 대립되고 있는 상황인데다 만인(萬人)과 만인이 경쟁에서 살아남아야하는 구조는 “싸움꾼”으로 몰아갔다고도 할 수도 있다. 우리들은 조금 양보하면 지는 것이고, 지면 퇴출이라는 강박관념에 시달리고 있다. 출세도, 부(富)도, 학력도, 정치도, 경제도 모두 내가 너를 딛고 일어서지 않으면 내가 죽게 된다는 제로섬(zero-sum)의 가치로 생각하며 사는지도 모른다.
나는 지난 일요일에 등산하면서 남들보다 떨어지면 안 된다는 습관화된 욕심을 반성하면서 이제까지 얼마나 많은 잘못을 하면서 상대방에게 피해를 준 것만 같아서 자괴심(自愧心)이 생긴다.
지금 밤 10시를 넘긴 시간 이다.
그 동안의 나의 삶은 앞만 내다보며 달리던 세월과 삶의 질곡이었다는 생각을 하니, 지금 마당을 비쳐주는 정원등 불빛이 그 동안 모르고 있었던 또 다른 정겨움으로 다가온다. 등산 할 때 한 쪽 귀로만 듣던 바람소리 와 깊은 계곡의 물 흐르는 소리의 진정한 값어치를 알 수 있을 것만 같다.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더 빠르게 걸어야하고, 조금이라도 빨리 살을 빼어야 한다는 조바심은 등산을 하는 오름에서, 워킹을 하는 공원에서 얼마나 서둘렀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요즘 능력 있는 가정에서는 빨리 빨리 교육을 한다. 풀어 말하면, 초등학교 5~6학년이면 중.고등 학교 학습과정을 마치고 외국으로 유학을 가서 외국 원주민만큼 영어를 할 수 있는 초 고속과정을 밟아야 성공 할 수 있다는
강박관념에 사로 잡혀 모든 것이 남보다 앞서야하고 빨라야 한다는 교육이다.
빨리는  또 다른 욕심을 잉태하고 욕망을 낳는다. 요즘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기러기 아빠”는 어쩌면 남보다 앞서가려는 마음에서 생기는 고혈압이나 동맥경화다.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빨리 더 많은 것을 배우기 위해 해외로, 해외로 떠나다보니 엄마는 자식 뒷바라지를 위해 자식과 함께 외국으로 떠나버리고 아빠는 혼자 남아 돈이나 버는 신세로 전락해버린 것이다. 기러기 아빠들이 수난은 자살과 불륜으로 연결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리고 요즘 매스컴에 자주 접하는 키워드(key word)는 “과력과잉”이다. 이런데도 빨리 빨리 교육전쟁은 여전하다. 우리 지역은 아니지만 시청, 군청 청소원 모집에 석사, 박사 출신들이 대거 지원하고 등대지기 모집 광고에 박사들이 줄을 선 기사를 보았다.
물론 직업에 귀천을 가리자는 말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빨리 빨리라는 조바심으로 사회의 메커니즘(mechanism)이 삐거덕거리고 있 것만 같아서 하는 말이다. 이제 빨리 빨리하는 조급증은 우리사회의 만성병이다.
이제 나는 턱까지 차오른 숨을 가라앉히고 한번쯤 바위에 걸터앉아 먼 하늘 흘러가는 구름도 보고, 바위 옆에 피어 있는 꽃향기라도 알아보는 여유를 가지는 결심을 해본다. 왜냐하면 내가 주위를 살펴보며 여유를 가지는 것이 나에게 처해진 현실의 병을 고칠 수 있는 유일한 처방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걷는 것, 운동의 효과 유무는 전문가의 몫이지만, 그동안 앞만 보며 앞서가는 사람을 미치기 위해 소모했던 에너지를 이제는 고스란히 내행복만을 위해 쓰겠다고 결심해 본다.
또 느림은 게으름과는 완연히 다르다. 나에게 천천히 와 느림은 다른 아름다움으로 다가 온다. 나는 느림을 습관화하는데 더 많은 인내(忍耐)와 인고(忍苦)가 더 필요 하더라도 나는 천천히, 천천히...... 아주 천천히 걸을 것이다. 왜냐하면, 빨리빨리 달리기를 멈추거나 천천히 걸어도 넘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수필가 김 찬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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