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손하면 약간 불편하다
겸손하면 약간 불편하다
  • 고 훈 식
  • 승인 2011.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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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의 내가 아니다. 없던 것이 많았던, 몰랐던 것이 많았던 내가 아니다. 소작인도 옛날의 그가 아니다. 나보다 더 없고 나보다 더 몰랐던 그가 아니다.
소작인은 동네 어귀에 있는 토담집에 살았고 10년 넘게 우리 논을 붙여먹고 살았다. 나는 마을에서 제일가는 부자다. 소작인은 흉년이 들어 소출이 적으면 미안하고 죄송스런 걸음으로 찾아와서는 공손하게 내년의 양식을 부탁하곤 하였다. 다른 사람에게 소작을 맡길 생각이 없었기에 늘 그 부탁을 들어주었다.
그렇게 우리는 사이좋게 지냈는데 소작인의 속은 그게 아닌 모양이다.
이것은 나만 아는 비밀로 우리 논에 이상한 물고기가 살고 있다. 물고랑이 깊은 개흙 속에 숨어 있어 개미가 들락거릴 정도의 숨구멍만 보일 뿐이라서 소작인도 용케 모른다. 그 물고기는 정력에 좋은 장어 과속이라 삶아서 먹고 남은 뼈는 갉아서 상처 난 피부에 붙이면 직방으로 낫는다.
대신 이 물고기에게 물리면 물린 다리엔 신경마비 증세가 온다. 허지만 밤이 깊어지기 전에는 활동을 하지 않아 사람이 물릴 확률은 거의 없기에 숨기고 있는데 산란하고 난 장어 암컷들을 슬그머니 잡아다가 고와서 가루를 내고 환으로 만들어 쉬쉬하면서 남에게 고가로 팔아왔다. 먹으면 정력제이고 바르면 피부병에 특효약이니 오늘 날 내가 이만큼 사는 것도 그 물고기 덕분이다.
그 물고기를 잡으려면 보름달이 뜬 밤에 논에 있는 물을 어느 정도 빼고 물길을 막아놓아야 한다. 개흙을 파내어 그놈의 꼬리를 붙잡고 잡아내려고 하다보면 본의 아니게 모를 짓밟게 되고 주변은 벌집 쑤셔 놓은 것처럼 엉망진창이 된다. 용의주도하게 물고기들을 다듬고 숨겨놓느라고 늦잠을 아니 잘 수가 없다.
논을 보려왔던 소작인은 가진 자의 심술인 줄로만 알고 속으로는 없는 설움에 빌어먹는 괄시라며 이를 갈지만 어쩔 수 없다. 소작인이니까. 가끔가다가 덤도 잘 받았으니까.
허나 소작인이 그곳을 종일 정비하다가 저물녘에 그만 물고기에게 물리고 말았다. 이튿날 고열로 신음하는 소작인에게 그 약을 먹이고 낮게 하였으나 이 증상은 오년동안 잠복되었다가 나타나는 질병이기에 나는 평생 동안 소작인과 함께 논농사를 지어야 함을 감지하였다.
몇 해 지나지 않아 태풍으로 소작인의 토담집이 맥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집을 새로 지을 돈이 없어 나에게 돈을 빌리려 왔다. 나는 돈을 빌려주긴 하되 복종심도 키울 겸, 서로 죽는 날까지 지주와 소작인으로 산다는 서약서를 쓰지 않으면 돈을 빌려줄 수가 없다고 사뭇 난처한 태도를 취했다. 이참에 소작인을 위한 배려도 하는 셈이니까.
똥마려운 자가 바지를 내리는 법, 소작인은 더욱 태도를 낮추고 조심스런 말투로 액수를 불렀고 나는 감질나게 헛기침 두어 번 한 다음에 돈을 빌려 주었다.
그런데 집을 새로 짓느라고 땅을 판 곳에 엉뚱하게도 고려청자가 몇 점이 나오고 말았다. 감정하느라고 군청에 바쳤고 도에서 유물로 인정되어 소작인은 엄청난 보상을 받았다. 하루아침에 떵떵거리며 살게 된 소작인.
그 후로는 돈 심부름하느라고 바쁜지 보기가 힘들었다. 중요한 사안이 있다고 전갈을 보냈더니 인상을 쓰면서 나타났고, 지주인 나에게 돈을 갚으면서 코를 실룩거리더니 새 옷을 찢듯 서약서를 찢었다.
여기까지는 나도 사람인지라 기꺼이 이해했다. 그런데 내가 이장으로 재추대를 받으려는데 돈의 위세를 믿고 소작인이 후보자로 나섰다. 국물을 얻어먹으려는 간신들의 부추김도 많으니 그 놈들의 표가 내 표가 아니라서 위기감을 느낀 나는 조건부를 들어 사퇴할 것을 종용하였다. 하지만 기고만장이다. 내년엔 물고기에게 물렸던 다리에 마비가 올 것이고 나의 비상약을 쓰지 않으면 결코 낫지 않는다. 내 약은 암거래로 이루어지기에 내가 양심을 빼고 흥정하면 돈을 왕창 주어야 구할 수 있다.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건방져서는 안 되지. 맞장 떠서 적을 만들어도 안 되지. 나 역시도 고개를 치뜰면 빗물이나 콧구멍으로 들어 올 뿐, 나의 장점을 북돋아주고 결점을 지적해주는 은인도 어느 덧 낯선 인물로 변하고 말지.
그런 내가 조용히 웃는데 나보다 등급이 높아졌다고 방자하게 웃는 옛날 소작인에게 이장 자리를 내주지만 애써 위축된 모습을 보이면서도 그 약은 나도 구할 수 없다고 설레발을 칠 것이다.

시인·문화관광해설사 고 훈 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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