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양철학의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에서는 밤과 여자를 음(陰), 동격으로 본다. 그리고 어떤 시인들은 밤을 여자와 같다고 한다. 또 순결하고 외로운 여자는 밤을 좋아한다고도 한다. 밤은 생활의 삭막함을 희석시킬 수 있는 최후의 보루이기 때문이다. 또 작가들은 밤을 죽음의 상징으로 사용하기도 하지만, 실제적인 밤은 우리들의 삶에 진귀한 가치가 있다. 그래서 밤은 조용하고 청초한 여성과 동일 시 하는 지도 모른다. 우리들의 어렸을 때 깊은 밤에 가족들과 오순도순 둘러앉아 이야기꽃을 피우던 기억을 가진 사람은 행복하다.
깊은 밤 연인들끼리 속삭이는 사랑은 더욱 따뜻하다. 밤에 보호받지 못하는 여인은 사랑의 참 맛을 모른다고 한다. 깊은 밤에 이루어지는 사랑만이 진정으로 따뜻한 사랑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칠흑 같이 어둡고 고요한 밤에 늦게까지 불을 켜고 있는 여자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따스하고 행복한 것이다.
여성들이 늦게까지 불을 켜놓고 책상 앞에서 사랑하는 이로부터 보내온 이메일을 읽거나 메시지답장을 보내는 것을 생각만 해도 고결하고 청초한 아름다움이다. 그래서 밤은 남자보다 여자들에게 더욱 필요한 자연의 섭리인지도 모른다.
어수선한 낮에는 마음 정리가 어렵지만, 깊은 밤에 혼자 책상에 앉으면 가족, 연인 등 같이 있지 못한 이들에 대한 가슴속 연정이 저절로 씌어 진다. 낮에 쓰는 메시지는 사무적일 수 있지만, 깊은 밤에 혼자 쓰는 메시지는 따뜻한
정의 울림이다.
낮에 한 생각이 논리 정연하고 투명할 수 있지만, 밤에 하는 생각은 가슴에서 나오는 사랑의 숨소리다. 낮이 활동이라면, 밤은 휴식이다. 몸과 마음의 피로를 풀며 자리에 누워 고요함을 누릴 수 있다. 그래서 밤은 평화이며 행복이다.
그리고 밤은 남자의 입장에서는 여자와 같은 마음의 밭이다.
낮에는 지치게 활동하고 지친 몸의 피로를 풀며, 비록 한방은 아니지만 아내와 다른 가족들의 잠든 모습을 볼 때 이런 기회를 마련해준 밤이 고맙기만 하다.
사르트르는 희곡<닫힌 문>에서 햇빛이 영원히 밝은 상황은 우리들을 질식하게 한다고 했다. 세기의 지성이라는 사르트르도 밤의 가치를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밤을 동반하는 하루가 고맙기만 하다.
밤은 체면, 예의, 권위 등에서 해방 할 수 있어서 더욱 가치가 있다. 밤이 되면 옷을 벗어도 좋고, 머리를 만지지 않아도 무방하다. 그래서 옷을 홀랑 벗고 이불속으로 들어 갈 때는 삶의 천국이다. 프랑스의 사상가 파스칼은 “인간의 모든 불행은 ?단 한 가지 고요한 밤에 들어 앉아 휴식 할 줄 모른데서 오는 비극일 뿐이다.”라는 말을 했다. 파스칼의 말한 조용히 혼자 생각할 수 있는 밤은 내일을 위한 생의 출발이다. 나는 깊은 밤엔 생각이 저절로 깊어진다.
이지구상에는 천여종류의 생명체가 살고 있다. 그중에 인간은 한 종류에 불과하다. 이지구상에 인구도 육십칠억 명이다. 그 육십칠억 명 중에 자신은 혼자다. 태어 날 때도 혼자고 죽을 때도 혼자다. 태어남과 죽음의 중간인 삶도 혼자이다. 밤에만 이런 고요한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이 나 혼자뿐만이 아닐 것이다. 또 아무리 가까운 이웃이라도 알아서는 안 될 비밀 이야기를 가족끼리만 나눌 수 있게 해주는 것도 밤이다.
문인, 철학자, 종교인들은 깊은 밤에 잠을 자지 않고 경건한 기도와 생각으로 열매를 찾은 것이다. 새 생명이 깊은 밤에 잉태되듯 위대한 사상, 위대한 예술 작품, 위대한 신앙도 깊은 밤에 잉태되고 창조되고 열매를 맺는다. 밤은 귀중한 것, 위대한 것, 성스러운 것들이 탄생되는 시간이다. 밤은 그런 것들의 씨가 뿌려지고 싹이 트고 자라는 풍요로운 시간이다.
그래서 밤은 여자와 같은 것이다. 여자는 밤에 솔직해지고 여성의 원초적인 모습으로 돌아온다. 여자의 밤은 여자의 우아함도, 섬세함도, 지성의 미도, 현모양처의 미덕도, 고결(高潔)함도 일시 접을 수 있다. 생의 원초적인 시간이 되기 때문이다.
밤은 어떤 그 시작과 그 끝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되며 함부로 사용 했던 “영원”이라는 말의 의미를 피부로 실감하는 시간이다. 밤의 배경이 되는 시간, 영원이라는 시간에 비추어 볼 때 귀중한 한 사람의 인생이 얼마나 짧고 무의미한 것인가? 그렇게 길게 보이는 인류의 역사가 얼마나 짧은 세월인가를 새삼 자각하게 된다.
이런 공간, 이런 시간 속에서 한 사람의 슬픔과 영광, 인류의 자랑스러운 업적이나 역사가 무슨 문제가 되며,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 밤의 어둠 속에 퍼져있는 무한한 시간과 공간을 접 할 때, 비로소 우리는 참다운 우리 모습을 발견하고 살아가는 의미, 모든 존재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 할 수 있을 것만 같아서 하염없는 넋두리를 해보는 밤이다.
수필가 김 찬 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