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평시평]우리 삶의 단상
[세평시평]우리 삶의 단상
  • 김찬집
  • 승인 2011.04.1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오랜만에 옛 친구들과 함께하는 저녁술자리다. 술잔을 몇 번 돌리는데 젊었을 때는 아주 잘나갔던 친구가 술을 계속 연거푸 마시면서 왜 치열한 생존경쟁을 하며 살아가야하는지 모르겠다며 요즘 카이스트 학생들의 자살을 자기 일처럼 애석해 하며 삶에 대한 깊은 회의를 느끼는 말을 술김에 하소연하는 것을 듣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이 친구의 속앓이 말을 들으면서 나도 갑자기 지금까지 살아온 수많은 생각들이 둑이 무너져 흘러넘치는 강물처럼 몰려든다. 사실 나는 우리들의 사는 인생을 잘 알지 못한다. 그리고 무엇이 좋은 소식이고 무엇이 나뿐 소식인지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남의 하는 대로 살아온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좌절과 마주치면 늘 그것자체가 도전과 극복의 동기를 만들어 준다고 생각하며 편안한 길보다 험한 길이 먼 훗날에는 좋은 것이라는 격언만 믿고 살아 왔다는 생각도 밀려왔다.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는 이 세상에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에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핀다고 느껴 생각을 하고 마음을 추스르며 다른 사람들의 하는 대로 뒤만 따랐다는 생각이 엄습해왔다. 이 친구가 ‘나는 왜 살고 있는가?’ 와 지금 내가 생각하는 ‘지금 나는 제대로 살고 있는 가?’ 등등은 이것이 바로 사바세계의 본질인지도 모른다.
삶이 버거운 어떤 사람들은 삶에 회의에 고뇌하는 우리를 보고 쓸데없는 지적사치를 부리고 있는 배부른 사람들이라고 욕할지도 모른다. 혹은 다른 사람들은 우리들의 고뇌에서 자신의 삶을 부정하는 무거운 분위기를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사실은 우리들도 당돌한 말이지만 지금까지 삶을 그 누구보다도 사랑하며 살아 온 것만은 사실이다.
지금 이 친구와 나는 ‘충분한 이유와 목적이 있는 삶’ 즉 자신만의 삶을 살기위해서 남의 삶을 맹목적으로 흉내 내는 삶을 거부하는 중이라고 생각해본다.
삶은 타인의 제스처를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나만의 제스처로 삶을 살아내려는 결단! 이것이 바로 삶의 고뇌다.
그러나 불행히도 대부분 사람들은 타인의 제스처를 흉내 내느라 자신의 삶을 제대로 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옆집 뒷집 모두가 일류대학 일류 직장을 갖기 위해 전쟁을 한다. 지금 카이스트 학생자살로 사회 큰 충격을 준 것도 타인의 흉내 내는 삶의 결과다.
‘장자(莊子)’의 한단지보(邯鄲之步)라는 유명한 이야기다. 연나라의 한 젊은이가 전국시대 문화 중심지 조나라의 세련된 걸음걸이를 배우려고 조나라에 가서 배우려고 하였으나 문화가 틀리고 천성도 틀려 배우지도 못했을 뿐 아니라
과거 자신이 배웠던 걸음걸이마저 잊어버리게 된다. 결국은 그 청년은 멋지게 걸기는커녕 초라하게 기어서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다. 이것이 바로 ‘한단의 걸음걸이, 즉 한단지보(邯鄲之步)라는 유명한 이야기다. 자신의 스타일로 살아야하는 것은 이제 충분히 장자의 이야기에서 분명해 지지 않았는가?
타인의 삶을 흉내 내지 말라는 시어가 또 있다. 김수영 시인의 초기 작품에 속하는 시다.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돌면서 나를 울린다./영원히 나 자신을 고쳐가야 할 운명과 사명에 놓여 있는 이 밤에/ 나는 한사코 방심조차 하여서는 아니 될 터인데/ 팽이는 나를 비웃듯이 돌고 있다./너도나도 스스로 도는 힘을 위하여/ 공통된 그 무엇을 위하여 울어서는 아니 된다는 듯이/ 서서 돌고 있는 것인가/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돈다/ 시인은 팽이에게서 자신의 삶, 혹은 우리 인간의 삶을 직감한다. 팽이는 아무리 기세 등등 하게 돌고 있다고 하더라도 언젠가는 멈추게 된다. 어차피 멈출 것을 왜 돌고 있는지 의아스럽기만 하다. 그래서 시인은 슬픈 것이다.
팽이는 오직 돌때만 팽이다. 돌기를 멈추고 바닥에 누어있는 것이 아니라, 돌기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시인은 스스로 채찍질을 해야 된다고 외친다.
시인을 포함한 우리 각자는 ‘영원히 나 자신을 고쳐가야 할 운명과 사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팽이는 다른 팽이가 도는데 어떤 도움도 줄 수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타인의 삶을 흉내 내는 순간에 멈추게 되는 것을 시인은 알고 있다. 우리는 팽이와 같이 스스로 채찍질을 해야만 하는 외로울 수밖에 없는 존재다.
그래서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고 누구에게서 사랑을 받으려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누구와 하나가 되려고 해서는 안 된다. 하나로 되려는 순간 돌아가는 두 개의 팽이처럼 어느 하나는 혹은 둘 다 돌기를 멈추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어떤 팽이는 자신만이 회전스타일을 강요하는 것에 몰려있다. 지금 우리는 경제적가치가 다른 모든 인간적 가치를 지배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경제독재 시대다. 자식의 학업성적도, 아버지의 직장생활도 모두 경제적 가치로 평가된다. 이럴 때 삶의 회의는 우리 이웃들이 스스로 도는 팽이가 되기 위한 채찍일수 도 있다. 시인의 그토록 원했던 팽이 시는 지금 딱 같아서 하는 말이다.

 

수필가 김 찬 집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