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난히 기승을 부렸던 겨울 한파도 어느덧 물러가고, 겨우내 움츠렸던 생명들이 기지개를 활짝 펴고 생명의 싹을 피워내는 봄기운이 성큼 다가옴을 느낀다.
그러나 그 따스함만큼이나 경찰 지구대의 밤은 길기만 하다.
경찰 생활하면서 가장 상대하기 힘든 존재는 살인범도, 칼은 든 강도도, 조직폭력배도 아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주취자이다.
주취자는 어떤 범죄를 저지른 사람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경찰이 강제 보호조치 등 공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대상도 아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주취자로 인하여 상당수의 범죄가 발생하고 있고 범죄의 피해자가 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할 때 주취자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처럼 공공의 평온을 위하여 그 누구보다도 강력한 제제가 필요한 대상이기도 하다.
이런 상반된 모순과 함께 인권침해 논란의 소지로 우리 경찰에게 있어 주취자는 상대하기 힘들고, 상대하기 괴롭고, 상대하기 싫은 존재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각종 언론매체를 통해 주취자와 관련된 사고들을 많이 접하고 있을 것이다.
경찰 지구대 내에서 주취자 방치로 인한 사망, 주취자 병원 후송 중 119 구급대원 폭행, 병원 내에서 주취자 난동으로 의사 및 환자 폭행 등등...
비단 경찰만이 아니라 이해관계를 떠나 제3자인 소방공무원, 병원관계자 등 어느 누구나가 주취자는 꺼려하는 존재임에는 틀림이 없다.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소학에서 술을 마시는 예법을 가르쳤으며 ‘향음주례(鄕飮酒禮)’라 하여 취하는 술이 아닌 즐기는 술 문화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술로 인한 추태와 분쟁이 끊이지 않고 있고 야간 112신고 가운데 절반 이상이 주취자와 관련된 사건들이다.
주취자와의 소리 없는 전쟁, 그것이 바로 우리 경찰의 현주소가 아닌가 싶을 정도이다.
경찰의 주취자 처리 비용이 연간 440억에 이르며, 음주로 인하여 살인, 강간, 폭행, 공무집행방해 등의 주요 원인으로 작용, 한 해 사회적 비용만도 20조원에 이른다고 한다.
특히 술 문화에 너그러운 우리나라에서는 단순히 사회적ㆍ경제적 비용을 떠나 주취자로 인한 경찰력의 낭비와 공권력 경시 풍조마저 만연해져 단순히 개인의 문제가 아닌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그러나 앞서 말한바와 같이 주취자는 평범한 우리의 또 다른 모습일 뿐, 범죄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주취자를 단순히 귀찮은 존재로 여기기보다는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마땅히 존중하고 보호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주취자를 해결하기 위한 법안이 수차례 상정되었으나 아직까지도 인권과 치안, 관계기관간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어 마땅한 해결책이 제시되지 않고 있다.
경찰과 소방, 의료기관, 지방자치단체가 합동으로 주취자의 인권과 공공의 평온을 유지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 시급한 현실이다.
그러나 그에 앞서 궁극적인 해결책은 바로 우리 자신에게 있다고 본다.
술을 마신다고 다 주취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술은 야누스의 얼굴처럼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적당히 마시면 삶의 활력소가 되는 약이 되지만, 지나치면 그동안의 모든 신뢰를 무너뜨리는 삶을 파괴하는 독이 되기도 한다.
酒不醉人 人自醉 色不迷人 人自迷 (주불취인 인자취 색불미인 인자미)
명심보감 성심편에 나오는 말로, ‘술이 사람을 취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스스로 취하는 것이요, 색이 남자를 유혹하는 것이 아니라 남자가 스스로 유혹되는 것이다’ 라는 뜻이다.
문제는 술이 아니라 그 술을 마시는 사람에게 있고, 그 술을 마시고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인격이 달려 있는 것이다.
渴時一適은 如甘露요, 醉後添盃는 不如無니라 (갈시일적 여감로, 취후첨배 불여무)
‘목마른 때 한 방울의 물은 달콤한 이슬과 같고, 취한 뒤에 잔을 더하는 것은 안 먹는 것만 같지 못하다.’ 라는 뜻으로, 이 글을 읽는 모든 이가 ‘한 잔 더’ 의 유혹을 과감히 뿌리칠 줄 아는 현명한 주도를 깨닫기를 바란다.
경찰과 주취자, 그들 간의 소리 없는 전쟁이 이제는 막을 내릴 때가 아닌가 싶다.
제주동부경찰서 오라지구대 경사 오 승 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