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쯤일까? 문우들과 대화 중에, 시인 김학선과 김성수가 뜻밖의 제안을 했다. 자신들 할아버지 석우(石友) 김경종(金景鍾)의 한문 유고집 ‘白首餘音’을 서울에 있는 김학무 형님이 보관하고 있는데 문화원에서 변역·출간하면 어떠하겠느냐는 이야기였다.
처음에는 그냥 지나가는 이야기로 들었다. 그렇지만 계속해서 제안을 하고, 북제주문화원이 제주출신 선인들의 고서를 번역하여 출판 중이라, 일단 유고집을 보고 평가를 내리고 싶었다. 그들의 형제들 중 김학렬은 오현고와 연세대를 졸업하고 한국은행에서 오랫동안 봉직했던 내가 눈여겨보았던 후배이기도 하다.
한문 유고집이 도착하고, 처음 젊은 한문번역가 백규상(白圭尙)에게 백수여음에 대한 평가를 부탁하였다. 백규상은 소농(小農) 오문복(吳文福)의 수제자로 이미 탁월한 번역 실력이 인정을 받고 있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백수여음’ 번역본은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다.
‘白首餘音’ 저자 석우 김경종은 누구인가? 그는 고종 25년(1888) 노형동에서 태어났다. 구한말의 거유인 간재(艮齋) 전우(田愚) 선생의 문하생으로 암울했던 일제하에서는 그 자취를 드러내지 않고 은일(隱逸)하다가 해방을 맞이하여 뛰어난 시재(詩才)로 영주음사(瀛洲吟社)의 사장으로 문인들을 규합하다 작고하신 우리고장의 정통유학자이다.
그리고 그의 스승 간재 전우(1841~1922)는 조선 후기의 성리학자로서 13세 때까지 오서오경(五書五經)을 두루 읽다가, 21세 때 충청도 아산(牙山)에서 유학사상을 익히며, 중국 송나라의 회암(晦庵) 주희(朱熹: 1130~1200)의 학문, 그리고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와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학문을 면밀히 탐구한 분이다. 송시열은 제주에서 유배생활을 보낸 오현(五賢)의 한 사람이기도 하다.
간재는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일본의 국권침탈을 목도하고서, 해도(海島)로 들어가 후학을 양성하고자하는 결의를 보이기도 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68세였다. 1913년 73세 때에는 더 많은 제자들을 양성하기 위해 계화도로 옮겨, 10여 년 동안 후학을 양성하면서 성리학에 관한 많은 저술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기호학파(畿湖學派)의 대미를 장식하였다.
‘백수여음’의 원문은 2권으로 시(詩)와 문(文)을 각 권에 따로 모아 연대별로 기록하였다. 저자인 석우 김경종은 제주4·3의 와중에서 큰 아들이 희생되었다. 특히 이 책 ‘이승만에게’와 ‘이승만 성토문’에서 제주4·3 당시 선량한 제주도민들이 군경에 의해 수 없이 죽임을 당하는 참상을 적나라하게 고발하고 있다. 그중 1950년에 지은 ‘본도의 4·3사건에 아들 창령이 뜻밖의 환난을 당해 진주에 붙들려 갔는데’라는 긴 제목의 칠언율시(七言律詩)가 주목을 끈다. 그 중 몇 구절을 뽑아보면, ‘世亂空添觸目愁(세상의 어지러움에 괜스레 더해진 근심) 骨肉不知烏有在(아들이 어딨는지 아아 아지 못하겠네) 淮魂遙向古園遊(혼 되어 노닐었던 옛 동산을 향하는가)’라는 대목이 눈에 띈다.
시인 김학선과 김성수의 시를 읽어보자. 두 사람은 역시 석우 김경종의 얼을 이어받았다. 최근 발간된『제주문학』 제53집에는 김학선의 「풍경」과 김성수의「빈 방」이 나란히 실려있다‘ 모두 짧은 시이지만 시인의 품성을 읽을 있다.
‘사람들 집으로 가네// 만산홍엽// 머리에 이고// 집으로 가네// 거무죽죽한 속진(俗塵) 탈탈 털어버린 듯// 참 맑은// 한 무더기 웃음소리// 만추를 건너가네’ -「풍경」전문
‘달그락,/ 끝내 피붙이 내려 놓지 못하고 제 귀에 박힌 질기고 질긴 문고리 그 긴 소리 하 애지도록 들창바라기 하고 있을 어머니/ 91살’ -「빈 방」전문
소설가 김 관 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