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가쁜 삶이 각박하고 삭막해도
“측은한 마음은 사랑의 시작이다(惻隱之心 仁之端也)”.
맹자(孟子)의 가르침이다.
‘측은한 마음’은 남을 헤아리는 마음이다.
내가 배부를 때 배고픈 사람 사정 헤아리고 내가 따뜻할 때 추위에 떠는 사람 사정 헤아리며 내가 건강하고 편안할 때 아프고 힘든 사람 사정을 헤아리는 마음, 그래서 서로 위로하고 가진 것을 나누고 베풀려는 마음’.
이것이 측은지심(惻隱之心)이다.
예 현인(賢人)들은 이를 사람이면 누구나 가져야 할 도리라 했다. 더불어 사는 사회의 근본이라 했다.
그러나 이같은 인간적 도리나 사회의 근본은 이미 ‘공자왈 맹자왈’ 시대의 유물로 박제(剝製)돼 박물관으로 간지 오래다.
위로하기 보다 상처주기 바쁘고 베풀려기 보다 빼앗으려는 데만 혈안이 되고 부축하기 보다 밀어 뜨려 짓밟아 버리는 데 익숙해 버린 세태, 그래서 사회는 더 삭막하고 점점 각박해지고 있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여기서 절망할 수는 없다.
이웃과 함께 하려는 긴 호흡의 느긋함보다는 눈앞의 이익에만 매달려 악을 쓰는 숨가쁜 삶 속에서도 우리가 챙겨야 할 소중한 가치는 어디에건 있게 마련이어서 그렇다.
세상에 온기 주는 아름다운 손들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써달라며 남모르게 성금품을 맡기는 익명의 기부자들이 줄을 잇는 것도 여기에 속할 것이다.
지난 11월 하순엔 충남 아산에 산다는 차 아무개 할머니가 제주도청에 낑낑대며 쌀 포대를 이고 와 신세진 공무원에게 전달하자 이를 어려운 이웃들에게 나눠졌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아직은 그래도 사회에 온기가 남아 있다는 증거들이다.
이것은 식어 가는 세상을 데우는 아름다운 마음들이다. 어둠 속에 빛으로 일어서는 따뜻한 손길이다. 12월 들어 이런 마음과 손길이 켜켜이 쌓이고 있다고 한다. 그래도 이 세상엔 희망이 있음이다.
이 같은 ‘아름다운 손’들은 넉넉한 사람들이기 보다 겨우겨우 살아가는 보통사람들의 것이기에 더욱 따뜻하고 더 찡한 감동이 되는 것이다.
아무리 잘나고 아무리 돈이 많은 사람도 성공의 9할 이상은 부대끼며 사는 이웃들로부터 나온 것이다.
그러기에 그들이 누리는 영화와 행복이 오로지 자기 재능 때문이라고 뽐낸다면 큰 착각이다. 이웃과 사회의 도움 없이는 일궈낼 수 없는 성과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진 자가 이를 나누는 것은 선심이나 시혜일 수가 없다. 당연한 의무고 사람의 도리다.
그런데도 사회에 베푸는 부자들은 그리 많지 않다. 그들은 더 많은 부를 쌓아 누리는 데만 열중하고 한 옴큼씩이라도 나누는 데는 너무 인색하다.
보통사람들이 나누는 ‘따뜻한 손’과 가진 자들이 누리는 ‘차가운 손’이 공존하는 사회, 참으로 묘하고 찝찝하기만 하다.
지친 영혼 위로하는 자선의 나무
베푸는 삶은 아름답다. 아름다움은 양팔을 벌려 한아름씩 감싸안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아름답다’ 한다.
베풀면 오래산다는 조사결과도 있다.
미국 미시간대 스테파니 브라운 교수팀이 1987년부터 지난해까지 423쌍의 노인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15년간의 생활패턴과 사망률 관계 조사결과, 친구 친척 등 이웃에게 도움을 많이 준 노인들보다 그렇지 않은 노인들의 사망률이 두 배 이상 높았다는 것이다.
“베푸는 사람이 장수한다”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렇다. 베푸는 삶은 아름답기도 하지만 건강유지를 위해서도 상당한 가치가 있음을 말해주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아름다운 자선은 남모르게 하는데 있다.
성서에는 ‘오른손 하는 일 왼손 모르게 하는 것’이라 했다.
주되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 사랑, 가진 것을 나누면서도 더 넉넉해지는 생활의 여유, 이것이 베푸는 삶이 일구어낸 사랑의 열매다. 우리가 갈무리해야 할 ‘베풂의 열매’다.
이를 키울 토양이 바로 남을 배려하는 ‘측은지심’이다. 열매를 여물게 하는 자양분은 작지만 진심이 담긴 따뜻한 손길이다.
고단한 육체와 지친 영혼을 위로할 수 있는 아름답고 그윽한 ‘자선의 나무’를 가꿀 수 있다면 아무리 경제가 어렵고 아무리 삶이 각박해도 세상은 살만한 가치가 있다.
12월에는 그런 따뜻한 사랑을 엮어내 데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