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을 때까지 나의 성 바꿀 수 없다”
“죽을 때까지 나의 성 바꿀 수 없다”
  • 고안석
  • 승인 2011.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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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최초 수의사 이달빈 선생 생애 책으로 출판/이문웅씨, ‘성명을 지킨 사람’ 펴내/창씨개명.신사참배 거부…한국인 자부심 끝까지 지켜
“창씨를 거부한 인사에 대한 일제의 가혹한 탄압은 극도에 달했으나 아버지는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성명을 끝까지 지키고 신사참배를 거부한 것이 너무나 자랑스러워 자손대대에 전하고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고자 ‘성명을 지킨 사람’이란 제호로 이 글을 마친다”
이문웅씨가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자신의 이름을 소중히 지키며 일생을 살다간
부친에 대한 자랑스러움을 한 권의 책을 엮어냈다.
‘성명을 지킨 사람-아버님 愚農께서 踏破하신 世路’이란 제목으로 세상사람들에게 선을 보인 이 책에는 저자의 선친인 故 이달빈 선생의 전업에 대해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를 경험한 저자의 선친은 1909년 제주인 최초로 일본 유학길을 오를 정도로 남다른 학업에 대한 열정을 보였다. 또한 그해 오사카상공보습학교를 졸업한 후 전문학교 입학 자격 검정고시에 합격했다.
하지만 1919년 2월8일 관서 지역 조선유학생회 주최로 열린 천왕사 공원 조선독립선언서 낭독 및 시위 주역의 한사람으로서 잇까이노 경찰서에 구금당하는 일을 겪었다.
이듬해인 1920년 오사카 부립대학 농학부 수의축산학과를 조선인 최초로 졸업했다. 조선인 최초로 수의사 자격 및 마약취급 면허증도 발급받았다.
이처럼 전도유망했던 이달빈 선생은 1921년 귀국해 강원도 최북단 회양군에 자리를 틀었다.
그는 이 곳에서 李王職 낙곡목장장 운영부장 겸 수의관으로 조선왕조의 남은 재산을 관리하는 일을 수행했다. 이 씨는 이 해 관립 수원고등농림학교 교수직 제의를 거절함으로써 요시찰 대상으로 일본의 집요한 감시 속에서 살아가야 했다.
당시 지식인이었던 이 씨는 창씨개명과 신사참배를 끝까지 거부했다. “부모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성을 내 생을 마칠 때까지 절대로 바꿀 수는 없소”라는 말로 이 씨는 끝까지 자신의 성과 이름을 지켜냈다. 하지만 그 댓가는 처참했다. 몰매와 온갖 모욕이 이 씨를 괴롭혔다.
저자는 이런 선친의 행동에 대해 “독기를 품은 칼날을 휘두르던 시기에 창씨를 거부한다는 것은 너무도 어렵고 상상할 수 없는 고난의 극복이기에 나는 이것을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는 말로 아버지에 대한 무한한 존경을 표하고 있다.
조선인 최초의 수의사, 초대 창경원 동물원장 겸 수의관, 제주도 최초 가축병원 개원, 최초의 공수의 등 수많은 수식어가 붙어 다니지만 정작 저자의 부친은 이런 흔적들을 하나도 남기지 않았다.
기록이 없기에 저자는 70이 넘는 나이에 조금씩 기억을 더듬으며 이 책을 완성한 것이다.
빠진 것도 많고 부족한 것도 많아 서운하다는 표현으로 아쉬움을 표했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와 3.1운동, 한국전쟁 등 근현대사의 비운의 역사 한가운데서 치열한 삶을 살아온 한 지식인의 삶을 글로 남겼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 자신의 성과 이름을 끝까지 간직한 한 제주인의 기록이 바로 이 책이다.
이문용씨는 ‘친일파와 창씨개명’‘일본의 역사 왜곡과 우리의 자세’‘호남선’‘한탄강’ 등 70여편의 논문과 수필을 발표했다.
이 씨는 현재 남북협력 제주도민 운동본부 이사, 지구문학 작가회와 녹담수필 문학회원으로 활동중이다. 또한 제주지방법원 민사 조정위원과 고부이씨 대종회 이사직을 수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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