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터와 정치
장터와 정치
  • 제주타임스
  • 승인 2004.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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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터는 장이 서는 날만 붐빈다. 장이 파하고 사람들이 뿔뿔이 헤어진 장터는 스산한 냉기마저 흐른다. 이것이 장터의 속성이다.

요즘은 오일장 앞에 민속(民俗)이라는 말과 시(市)짜가 중간에 끼어 민속오일시장으로 불리기도 하지만 옛날 오일장으로 불릴 때도 장터는 시장의 기능을 다했다. 그 때의 장터는 다양성을 내포했다. 시장기능은 물론 만남의 장소가 되기도 했고 새로운 정보도 주고받았다.

오일장이 서는 날이면 적조(積阻)하게 지내던 사돈도 만나고 달포쯤 소원했던 시누이와 올케도 만나 회포를 풀었다. 그래서 장터는 서민들의 삶의 한 축이었다. 어머님은 살아생전에 이 장터를 통하여 세상 돌아가는 것을 가늠했다.

4.3사건이 발발하고 초토화 작전으로 소개령이 발동되어 집을 불태운다는 소식도 이 장터에서 들었노라고 했다. 조상 대대로 대물림해온 집을 불태워야 하는 그 절박한 상황을 어머님은 오일장에서 들었던 것이다. 이렇게 옛 장터는 우리의 삶과 애환이 점철된 질곡의 현장이었다.

장터의 기능 중에 하나가 이곳에서는 가격을 흥정으로 정한다. 쉽게 말하여 주객(主客)이 가격 결정의 ‘헤게모니’를 공유하는 것이다. 그 날 물건이 많이 나오면 값이 내려가고 물건이 귀하면 값이 올라가게 마련이니, 유통구조의 기본원리를 실행하는 셈이다. 장터에는 현대식시장이나 ‘할인마트’처럼 가격표나 ‘바코드’가 없다. 그래서 장터를 찾는 사람들은 흥정하는 맛을 만끽한다.

흥정을 하는 와중에는 목소리도 높이고 삿대질이 오가기도 하지만 그래도 장터에는 가격파괴가 있고 덤이 상존한다. 그러기에 장터에 가면 사람 사는 정취를 느끼게 된다. 장터는 5일에 한번 장이 서는 날에만 흥청대고 신바람이 난다. 장이 서는 날, 낮술을 마시고 고성방가를 질러도 크게 흉잡지 않지만 장이 파하면 스산하기 이를 대 없는 게 장터의 뒷모습이다. 그래서 장터를 인생과 비유하기도 한다.

옛날의 장터는 역사의 현장으로도 한 몫을 했다. 유관순 열사가 대한독립 만세를 불렀던 아우네 장터, 경상도와 전라도가 만나는 화개장터, 이효석의 소설 메밀꽃 필 무렵에 나오는 봉평 장, 조정래의 태백산맥에 나오는 장터는 빨치산이 접선장소가 되기도 했다. 그래서 이 장터들은 오랜 세월 역사의 한 페이지에 자리해 왔다.

장터에는 파는 사람과 사는 사람 이외에 타인의 틈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것이 곧 장터의 생리다. 그런데 이 장터에 진풍경이 벌어질 때가 있다. 그 때가 선거철이다. 이 때만 되면 장터가 부산하다. 평소에는 관심이 없던 정치지망생들이 장터를 불티나게 찾는다. 그 중에는 몇 번씩 이 장터를 찾아 정치인의 반열에 오른 사람도 있다. 이번 17대 총선에는 유난히도 그들이 장터를 자주 찾았다고 한다.

손가락이 잘 펴지지 않는 할머니의 굳은 손을 잡고 내가 국회의원이 되어야 할머니가 잘살게 될 것이라고 침을 튕기는 것이 입후보 마다 천편일률(千篇一律)적이었다. 그들은 상생의 현장인 장터에서 상생의 정치를 하겠노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상생의 정치, 말이야 그럴 듯하다. 상생의 현장에서 상생의 정치를 약속한 그들이다.

총선 기간 중에 그렇게 떼를 지어 찾아다니던 입후보들이 당락(當落)을 떠나 선거가 끝나고 몇 사람이나 장터를 찾았을까. 선거가 파장(罷場)이라고 장터마저 파장으로 보아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상생이 정치를 외치는 정치인들은 이 장터에서 상생이 어떤 것인가를 배워야 한다. 그것이 상생의 정치로 가는 첩경(捷徑)인 것을….

수필가  조     정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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