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평시평] 정의로운 사회를 위하여
[세평시평] 정의로운 사회를 위하여
  • 제주타임스
  • 승인 2010.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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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해 명쾌한 답을 내린 마이클 샌델 교수를 만났다. 역시 세계의 수재들인 수천 명의 하버드대학생을 주무르는 고수임엔 틀림없었다.

그는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도덕관과 철학의 고수로 통하는 사람을 모두 불러들였다.

아리스토텔레스, 칸트, 벤담, 밀, 롤스 등 시대를 초월한 학자들의 주장을 현실에 적용해가며 꼼꼼히 짚어 준다. 그리고 맨 뒤에 자신의 견해를 슬쩍 덧붙이는 기법을 활용했다.

내가 바라는 공정한 사회는 출발과 과정에 대해서 공정한 기회가 주어지고 결과는 스스로 책임이 주어지는 사회라고 믿어왔다.

정의로운 사회는 정당한 권리가 침해당하지 않으며 자유가 보장되고 넘어진 사람이 다시 일어설 수 있고 일어선 사람이 다시 올라설 수 있는 사회, 서민과 약자가 불이익을 받지 않은 사회라고 생각해왔다.

샌델교수의 강의를 접하면서 정의를 고민하는 것은 ‘최선의 삶을 고민하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사회가 정의로운지 묻는 것은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것들, 예를 들면 소득과 부, 의무와 권리, 권력과 기회, 공직과 영광 등을 올바르게 분배하는 지 묻는 것이라고 했다.

공리주의자들의 정의는 ‘최대다수의 최대 행복추구’에 있었다. 공리주의는 쾌락 또는 행복의 극대화를 선으로 간주하면서, 권리에 초점을 둔 어떤 제도가 그것을 성취하겠느냐고 묻는다.

이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의 반론은 ‘선은 쾌락을 극대화하는 게 아니라 우리 본성을 실현하고 인간 고유의 능력을 개발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가장 바람직한 삶의 방식부터 심사숙고해야만 무엇이 정의로운 법인지 알 수 있다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정치는 ‘좋은 삶을 사는 법을 터득하는 것’이라고 했다.

칸트와 롤스는 권리를 선보다 앞세우며, 권리와 의무를 정하는 원칙은 좋은 삶에 대한 주관적 견해에 기초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특히 칸트는 ‘인간을 자율적인 존재로 여긴다면 의무와 권리를 규정하는 도덕법부터 정한 후에야 그 원칙에 맞는 선이 무엇인지 물을 수 있다’고 하였다. 여기서 도덕의 최고 원칙을 둘러싼 철학자들이 카오스를 진단했다.

샌델교수는 좋은 삶을 위해서는 ‘함께 고민하고 으레 생기게 마련인 이견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문화를 가꾸어야한다’고 주장한다. ‘정의는 올바른 분배만의 문제는 아니다. 올바른 가치측정의 문제라며 오늘날의 정치적 주장은 대개 행복과 자유, 즉 경제성장과 권리존중이 중심이 된다.’고 했다.

소득과 부의 공정한 분배는 1970년대부터 지금까지 정치철학의 논쟁의 중심이었다. 예를 들어 부자의 돈을 세금으로 거두어 가난한 사람에게 골고루 나눠주면 가난한 사람들의 행복은 늘일 수 있지만, 부자들은 노력의 대가를 잃게 됨으로써 돈을 벌려고 하지 않게 되기 때문에 생산성이 줄어들고 사회발전이 멈추게 된다.

그러기 때문에 사회적 합의로서의 공동선의 추구가 정치의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물질의 풍요 속에 살면서도 더 많은 물질을 차지하려는 소유욕 때문에 정의의 가치척도가 되는 도덕적 정신적 결핍이 문제가 되고 있다.

‘우리가 물질적 빈곤을 없애려고 아무리 노력한 들 더 어려운 일이 따로 있습니다. 우리 모두를 괴롭히는 만족의 결핍에 맞서는 일입니다.’라는 케네디의 명언을 현대인들은 깊이 새겨들어야 할 말이다.

결론적으로 정의를 바라보는 3가지 관점은 ‘행복의 극대화, 선택의 자유 존중, 미덕을 추구하고 공동선을 고민하는 것’이라고 하며, 정의를 구현하려면 사회적 경제적 불이익을 바로잡고 모든 사람에게 성공할 기회를 공평하게 나눠주는 정책을 펴야 한다고 했다.

정의로운 정치는 공정성이 보장된 가운데 사람들의 가진 고유의 능력과 미덕을 개발하게 하며 판단력을 기르고 시민자치에 참여하도록 하게 된다. 따라서 정치의 궁극적인 목적은 공동체 전체의 운명이 걸린 공동선을 고민하고 걱정하며 풀어나가는 과정이다.

정의로운 정치지도자는 민주시민으로서 본을 보이며 공동선을 숙고하는데 앞장서서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우리 사회 언제면 정의가 강같이 넘쳐흐르게 될까. 지도층의 각성이 없는 한 요원해 보인다.

 강 선 종
수필가 총괄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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