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살아가면서 아름다운 삶을 꾸려가는 사람을 만났을 때 우리는 감동한다. 우리가 직접 만날 수는 없지만, 멀리 파키스탄에서 자선사업을 하는 압둘 사타르 에디도 그런 사람이다.
그는 여든을 넘긴 나이지만 세계인을 감동시키면서 희망의 언어를 던져 주고 있다. 작년 한국 포스코청암재단에서 수여하는 봉사상을 받았고, 노벨평화상 후보로도 매년 거론되는 인물이다. 파키스탄의 마하트마 간디이자 마더 테레사라고 불리워지기도 한다.
압둘 사타르 에디는 라치 복지센터 고아원 안의 조그만 방에서 지금도 부인과 검소하게 지내고 있다. 1950년대부터 파키스탄 카라치의 빈민가에서 진료 활동을 시작하면서, 자선단체 에디재단을 설립했다. 지금 파키스탄 전역에서 250여개의 복지센터를 운영 중이며, 최근 홍수 피해를 당한 이재민 돕기 성금으로 3550만 달러를 모금하기도 했다. 이 금액은 파키스탄 총리가 주도한 구호기금보다 2배가량 많은 것이다.
그는 홍수 피해가 심한 북부 페샤와르의 길바닥에 앉아 4시간 동안 1만5000달러를 모금해서 모두를 놀라게 했다. 에디재단의 카라치 복지센터는 하루 25명의 홍수 사망자 시신을 수습하고, 120대의 구급차로 현장을 누비며 구호활동을 펼치고 있다. 필자는 그가 한 말 중에서 “나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구걸하는 거지”라며 “이슬람 성직자들이 종교의식과 투쟁에 몰두할 것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게 신앙의 초석”이라는 말이 기억에 남는다. 그는 홍수 이재민 돕기에 적극적으로 나서 ‘국민적 영웅’으로 떠오르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에서 압둘 사타르 에디와 견줄 수 있는 인물은 과연 누구일까? 필자는 함석헌이라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우리는 보통 함석헌을 겨레의 스승, 한국의 간디라고 말한다. 2009년 지난해는 함석헌 서거 20주기였다. 그를 위한 행사도 다양하게 치러졌다.
함석헌, 그는 야인이었다. "밤에는 시원한 뽕나무 아래서 한 숨 자고, 다음날 아침 유랑을 계속하는 나그네"였다. 한 때 외국의 언론들이 그에게 ‘한국의 간디 퀘이커 함석헌’이라는 수식어를 달았다. 그에게 퀘이커리즘은 단지 새 종교의 씨앗을 담긴 가능성의 종교였다. “나는 이제 우리의 나갈 길은 간디를 배우는 것밖에 없다고 생각한다.”고 외쳤다.
일찍이 일본유학 시절부터 무교회주의를 배우고 실천하였지만, 그는 결코 무교회주의자가 아니었다. 우찌무라는 우찌무라고 함석헌은 함석헌이었다. 기실 그는 어떤 주의나 사상 혹은 종교에도 걸림이 없는 자유인이었다. 그냥 자유인이 아니었다. 그는 영원한 구도자였다. 길위의 사람, 도인이었다. 그래서 그는 압둘 사타르 에디와 너무나 닮았다.
그는 민중들의 가슴속에서 사자후를 발했다. '뜻으로 본 한국역사', 역사가 지시하는 우리의 사명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일갈했다. “생존경쟁 철학 위에 서는 애국심은 이 앞의 세계에서는 배척이 되어야한다. 우리가 이 땅을 사랑함은 이른바 조국애에서가 아니다.
여기를 묵이고는 하늘나라를 임하게 할 곳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민중을 사랑함은 이른바 동포애에서가 아니다. 이 사람들을 내놓고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곳이 없기 때문이다. 이들을 잊고는 하나님의 뜻을 나타낼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백성이 제 노릇을 하여야 한다는 것은 생존권에 대한 주장이 아니라 진리에 대한 주장이다. 한민족이 못사는 것은 온 우주의 아픔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슬픔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심장 위에 이 진리의 무장이 완비되는 날 저는 새 시대의 용사다.”
김 관 후
시인/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