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누구나 하루를 살아갈 일이 두려워 본 적이 있을 것이고, 또 하루를 살아갈 일이 지겨워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나는 절벽 같은 늙음의 암담함 앞에서 자신을 망실한 채 얼 떨떨 할 때가 가끔 있다. 절망과 투쟁할 힘도 없을 만큼 늙으면 마음도 늙어서 더 이상 괴로울 것도 비참할 것도 없으련만 지금은 늙음으로 가는 길이어서, 젊었을 때는 상식으로도 용납하기 어려운 비참한 절망으로 하루가 어려울 때가 있다.
늙음은 인력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늙음은 인생의 원리 중 하나일 뿐이다. 살면서 절감한 것은, 인간은 결국 ‘나’ 혼자라는 것. 말로 소통하고 사랑하고 어떠한 역할을 할지라도 각자가 각자대로 홀로 살고 있을 뿐이다.
이지구상에 생명의 종류는 1000만개라고 한다. 그 중에서 인간이라는 생명은 한 종류에 불과하다. 또 인간이라는 생명도 지구상에 67억 명이다. 그중에 자신은 ‘혼자’ 다.
태어날 때도 혼자태어 났고, 죽을 때도 혼자다. 태어날 때와 죽을 때의 중간인 삶 자체도 궁극적으로는 혼자다. 혼자 생을 걸어가는 과정도 대동소이하다.
사람은 시인의 감성으로 팔팔하던 이십대를 통과하고, 시시콜콜한 일도 인생의 멋진 경험처럼 장황하게 생각하는 삼십대를 지나면서 역사와 종교, 철학 등 인생의 의미를 배워 알기를 포기한 자는 인생을 포기한 자라고 생각하면서 산다.
그걸 인식하고 삭이면서 사생결단하듯 불혹세대를 넘으면, 지천명세대 건너는 동안에는 흘러간 과거란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
이순에 다다르면 멋진 미래가 오리라고 기대하며 속아 살 필요도 없다. 과거와 현실을 확실하게 직시하며 미래를 점칠 만도 한 늙음은 이순이다. 이때부터가 인생은 혼자이고, 늙음 앞에 서있는 자신의 자신을 본다.
인생의 이순까지 되면 빈손으로 이 세상에 와서 엔간히 손에 쥐고 산다. 빈손으로 돌아갈 때가 머지않건만 아직도 잘 쓸데기 없는 것을 너무 많이 소유하고 있는 세대다. 할 말, 쓸 말이 태산 같은 줄 알지만 사실은 유구무언이어야 하는 세대다.
나는 내 인생이라고 기를 쓰며 살았지만, 내 인생이란 게 별로 없었다. 얽히고설키며 휘둘리는 줄도 모르고 잘난 체하며 잘 사는 척 살았다.
철부지시절엔 뭐가 뭔지 모르고 온갖 것에 현혹되어 뒤적거리고 살았다. 인생이 뭔가를 스스로 발견하면 철든 것이라고 한다. 철든다는 것! 서른이면 철들까, 쉰 살이면 철들까 했지만 어림없다. 우리 윗세대들은 나이 일흔이면 철나는 줄 알았더니 희수가 되고서야 인생에 철이 좀 들더라고 하셨다.
혹 신부나 스님은 완전히 철든 인간일까? 또는 학자나 예술가가, 자기가 세운 관념과 선택한 길에 매진하여서 소위 성공한 사람으로 평가한다. 이분들이 철든 인생이란 뜻일까? 아니면 수천수만의 사람에게 생활비를 벌게 해주는 대기업가가 철든 인간일까?
존경하지만 “좋은 직업 또는 참 잘하는 일을 가진 사람” 일 뿐이다. 사람은 누구라도 진실로 시간과 늙음 앞에 겸허할 때 철이 드는 게 아닐까. 철들기가 얼마나 지난하기에, 우리 속담에 오죽하면 인생에 철들 만하면 이미 죽을 때라고 했을까.
그런데 이렇게 힘들게 철든 존재, 곧 위대하다고 흠모되고 숭앙되는 현자일지라도 그들이 내게 생명과 세상을 주진 않았다. 내가 진정 자유의지의 인간이 되는 데에 소위 성현의 지혜가 지대한 도움은 되었을 것이다.
내일을 알지 못하고 살던 젊은 날, 상한 갈대처럼 꺾인 나의 미래는 희망이라기보다 말하기 창피한 말이지만 욕계삼욕(欲界三欲)만 동경했다.
역사상 위대한 성현으로 기록된 어떤 사람도 완전한 성현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아니다. 다만 그들은 인간과 인생이 무엇이며 어떠해야 하는가를 탐구했다.
내일은 어제와 다르리라고, 달라야 한다고, 오늘 추구하지 않는다면 무슨 재미로 머나먼 인생길을 걸어갈 수 있겠냐며 그렇게 앞서 걸은 사람이 인생에 철든 철인(哲人)이 석가모니요 소크라테스다. 그들은 늙음을 재미나게 살다 간 천재들이다.
그들은 범주 속에 안주하지 않고 인생에 열정으로 달려들어 탐구하여 각성했으므로 현철(賢哲)이 된 것이다.
누구나 문학 소년기를 지나지만 아무나 문인이 되지는 못한다. 더더구나 누구나 인생이 뭔가를 묻지만 끈질기게 자문하며 노력하여도 철드는 성자가 되지는 못한 사람이 거의이다. 그래서 소위 선각자의 인생관을 배우며 닮아 보려고 공부하는 것이다.
누구나 대동소이 할 테지만 나는 젊었을 때는 늙음의 어려움을 몰랐다. 시대를 따라 어렵게 인터넷, 핸드폰을 숙달했는데 이제는 스마트폰 트위터 배워야 살 수 있는 세상이다. 이걸 숙달할여니 한숨이 나온다. 그게 내 깨달음의 시초다. 거듭남이고 거듭 삶이다.
과거도 미래도 없는 시간의 고요함, 생명의 먼 물소리, 세상 빛의 아름다움과 숭고함을 발견할 때가 늙음 앞에서 참으로 한가하고 여유로워질 것이다. 그곳엔 참된 정신과 신이 함께 있기 때문이다.
김 찬 집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