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힘내세요"
"아빠 힘내세요"
  • 김덕남 대기자
  • 승인 2004.12.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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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단하고 처량한 아버지의 삶

'아빠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 아빠 힘내세요 우리가 있어요'.
어린 자녀와 젊은 아내가 보내는 응원이다. 어느 TV 광고에서다.
이 광고를 접할 때마다 오늘을 살아가는 아버지들의 '슬픈 자화상'을 보는 것 같다. 여간 씁쓸하지가 않다.
밝고 명랑한 멜로디인데도 그렇다.

거기에는 '상실의 시대'를 살아가는 보통의 대한민국 남성들의 쪼그라든 페이소스(pathos)가 진하게 묻어있다.
그래서 그것은 '무력한 아버지, 주눅든 가장, 고개 숙인 남자'에게 보내는 "화이팅"으로는 들리지 않는다. 오히려 처연한 느낌만 들뿐이다.
이 땅의 평균적 아버지들의 삶은 너무도 고단하고 처량하다.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쓸개는 이미 떼어놓은 상태다. 자존심은 박물관으로 보낸지 오래다. 그러면서도 위아래로 찌들려 눈치보기 하나는 기막히다.
그래도 이는 다행한 편이다.
"아빠는 언제 방학이 끝나느냐"고 실직해 집에서 노는 아버지에게 묻는 철부지 자식보기가 민망해서 집을 나와 하릴없이 거리를 배회하는 아버지들과 비교하면 그렇다.
그렁그렁 고인 눈물 떨어질까봐 공원 벤치에서 하늘만 쳐다보는 허기진 가장들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원성으로 번지는 절망의 노래

사회로부터, 직장으로부터, 가정으로부터 거세당하고 몸도 마음도 쪼그라들 대로 쪼그라들어 가는 아버지들. 왜 을씨년스런 날씨까지 차갑게 뼈 속을 파고드는지. 아버지들의 12월을 그래서 야속하기만 하다.
몸 푸는 여인처럼 이 악물고 몸부림쳐도 희망은 보이지 않는다. 실날같은 빛도 찾을 수 없다. 캄캄한 절망뿐이다.

삶이 불안해 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런데도 사회적 안전망은 부실하기 그지 없다. 빈부 양극화 현상은 더욱 격차가 벌어지고 민생은 절망에 빠져 일상을 절규하고 있다.
그것은 절망의 노래다. 정치.사회 현상에 대한 원성이다. 원성이 높다는 것은 그만큼 고통지수가 높다는 이야기에 다름 아니다.

최근 통계청 조사결과가 이를 말해준다.
전국 가구의 27.6%가 '출혈살림'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소득보다 지출이 많은 적자생활을 뜻한다.
가계 소비지출 중 먹거리 비용이 차지하는 이른바 엥겔계수가 4년만의 최고치인 28.4%를 기록했다는 것이다.
이는 먹고살기조차 힘들만큼 살림살이가 쪼들리고 있음이다.

희망의 窓 닫아버릴 순 없다

"아빠 힘내라"고 아무리 용쓰는 응원을 해도 허리를 펴지 못해 더욱 주눅들고 더더욱 작아지는 아버지 탓만 할 수는 없다.
그래서 먹고 살 요량도 없이 맨 날 이념의 악다구니만 계속하는 정치권을 보는 백성들의 눈빛은 예사롭지가 않다.
무능과 무책임과 무분별을 그럴 듯이 포장하여 개혁인양 뽐내는 위선적이고 독선적인 정권에 보내는 눈빛에는 차가운 독기가 서려있다.

그것은 바로 '절망의 시대'를 살아가는 이 땅의 평범한 수많은 가장들 가슴속에 맺힌 응어리나 다름없다.
이 같은 응어리는 80만명을 육박하는 실업자들의 가슴에서도 독기를 뿜어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빠에게 "힘내라"는 가족의 격려가 귀에 들어올 리가 없다. 그것은 되레 "아빠노릇 못해 먹겠다"는 패러독스에 불을 지필 뿐이다.

그러나, 어쩌랴. 절망과 독기로 네 탓만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어둠이 짙으면 새벽이 오듯이 절망의 깊이에는 희망이 있다지 않는가. 그래서 절망에 찌들어 기회의 창(窓)을 닫아버릴 수는 없다.
절망을 뛰어넘어 희망을 엮는 희망.
그렇다. 그것이 바로 이 땅의 아버지들이 모두 함께 엮어야 할 '아빠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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