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평시평] 벌초(伐草)문화
[세평시평] 벌초(伐草)문화
  • 제주타임스
  • 승인 2010.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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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딘 조선 낫 들고엄니 누워 계신 /종산에 간다 /웃자란 머리 /손톱 발톱 깍아드리니/ 엄니, 그놈 참 /서러운 서른 넘어서야/ 철 제법 들었노라고/ 무덤 옆/ 갈참나무 시켜 /웃음 서너 장 /발등에 떨구신다/ 서산 노을도 / 비탈의 황토 /더욱 붉게 물들이며/ 오냐 그렇다고 /고개 끄덕이시고…….
이재무 시인의 "벌초"라는 시어다. 고향의 구수한 냄새가 물씬 담겨 있다.

벌초에 대해서 진지한 그 무엇을 느낄 수 있다. 죽은 자와 산자가 하나 되는 무대다.
벌초는 미풍양속으로 고향 근처에 사는 후손들이나 외지에 나간 후손들이 고향에 와서 조상의 묘에 드리는 유일한 효심이다. 산자가 죽은 자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의 예배다. 백중이 지나 처서(處暑)가 되면 풀의 성장을 멈추기 때문에 이때 벌초를 하면 비교적 오랫동안 산소가 깨끗이 보전되기 때문에 추석 전에 하는 것이다.

제주벌초문화는 음력 팔월 초순이 되면 일가(一家)가들이 모여 벌초를 하는데 이를 “소분(掃墳)”또는 “모듬벌초”라고 부른다. “모듬벌초”는 음력 8월 초하루부터 왕래가 잦은 친족끼리 하나의 패를 형성하여 가계벌초를 하는데 보통 8촌 이내다. 이는 혈족의 분파를 가지로 보고 동성(同姓)마을에서도 파가 다르면 따로 벌초를 한다. 별도로 문중(門中) 모듬벌초를 하는데 날짜가 정해져 있기에 정일벌초(定日伐草)라 부르기도 한다.

벌초는 추석 전에 하는 것이다. “추석 전에 소분 안?민 자왈 썽 멩질 먹으레 오매.”라는 제주 사투리가 전해지고 있다. 추석 전에 소분을 안 하면 조상이 덤불을 쓰고 명절에 오신다는 의미다.

그래서 음력으로 8월 초하루가 넘으면 제주의 온 산야, 들판이 벌초 인파로 붐빈다. 우리 제주지역의 조상숭배사상과 제주인의 섬세한 근면정신으로 제주지역에 거주하는 사람 중에 어느 누구도 벌초를 하지 않고 8월을 넘기는 사람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기에 자손들 중 조상의 제사에 참석하지 못한 것은 큰 흠이 되지 않지만 벌초에 참석하지 않은 경우에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그 죄송스러움을 감수해야 하며 어떤 종친회에서는 불참자에게 궐금(闕金)을 받는 가문도 더러 있는 모양이다.

그런데 벌초 문화도 시류의 변화에 따라 많이 변화되는 것만은 사실이다. 그 일례로 장례문화가 매장문화에서 화장문화로 많이 변하고 있다. 시류에 맞는 변화이다. 고려시대에는 매장보다 화장장례를 귀족들의 선호하였으며, 매장은 화장을 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만이 땅값이 아주 싸기 때문에 매장을 했다는 역사자료를 읽은 기억이 난다.

과거 농경사회에서는 친족 일가가 한 농촌에 모여 일년 열두달을 같이 살았으니 벌초 하는 일이 조상숭배사상을 고양시키는 좋은 풍습일 수밖에 없었고 친족의 유대, 교육 등을 위해서 극히 필요한 가치였다. 그리고 그 당시 조상의 묘는 마음의 고향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세계화, 정보화 시대다. 시간과 비용은 고향방문을 허락하지 않는 세상 이다. 장례문화도 제주시 양지공원에 모시는 것이 시대의 가치다. 생활문화는 시대환경에 맞추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고향농촌에는 젊은 사람들을 보기 힘든 농촌으로 변한지 오래다.

농촌에는 벌초 할 인력이 턱없이 부족한 것이다. 더러는 도시에 여유 있게 사는 젊은이들과 친족규율이 너무나 엄격해서 서울이나 일본 등에서 벌초하기 위해서 비행기 타고 오는 이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에너지낭비 뿐 아니라 꽉 짜인 현대생활에서는 버거운 것이다. 버거운 것은 생활 문화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최근 한 통계에 따르면 근년에 단 한명도 태어나지 않은 읍. 면. 동이 전국적으로 8군데에 이르고 10명 이하인 곳은 290곳, 100명 미만인 곳은 2,056곳에 이른다고 한다. 지금농촌은 아이들의 울움소리,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가 끊어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아무도 그 통계를 보고 그에 맞는 생활 문화로 고치자는 기미는 없다.

고용 없는 성장에, 세계경제위기에, 청년백수 시대에 밟히고 치인 이 땅에 많은 젊은이들이 농촌을 등지고 고향을 등지고 세계의 流民(유민)으로 전락되어 세계화라는 파도에 휩쓸려 가고 있다. 각박한 도시생활에 자기부모도 병원에 입원 시키고 연락을 끊는 이런 삭막한 세상에 과연 벌초문화가 이대로 좋은 것인지 한번은 깊이 생각해 봐야 할 것만 같다.

그럼에도 우리 나이가 된 사람은 벌초 문화에, 농촌의 정서에, 고향의 포근함에 미련이 있는 자가 대부분일 것이다. 우리 세대는 농촌은 희망이었고, 마음의 고향이었고, 어머니의 품안 같은 것이었다. 나이가 들면 농촌에 가서 서정생활을 하면서 인생을 마무리 한다는 희망을 가지고 자란 우리들이다. 그러나 시대가 이런 걸 어찌 할 수가 없는 노릇 아닌가?

김  찬  집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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