落照의 빈터에 밝은 해야 솟아라
落照의 빈터에 밝은 해야 솟아라
  • 제주타임스
  • 승인 2004.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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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월은 수 없이 피고 지는데 한라산은 만고에 늠름한 모습으로 그 자리에 의연한 모습으로 서 있다. 산천단의 곰솔도 비 바람 서리를 맞으면서 늘 푸른 선비의 기상을 지니고 있다. 제주바다도 사시절 변함없이 파도를 몰고 왔다가 수평선으로 달려간다. 바람은 한라산에서 여전히 흘러 내리고, 나무들은 하늘을 향해 분수를 뿜어 올린다.

오름들도 마을들도 돌담도 그 자리에서 풍상을 견디며 살아 간다. 이렇듯 시작과 끝이 없을 수 없는 자연의 흐름속에서 생명은 탄생하고 성장하여 죽음에 이른다. 그 영원 순환의 어느 자리에는 특별히 장엄한 순간도, 무의미도 있을 것이다.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는 의식도 순환 원리의 한 표상이 아닐까 싶다. 인간들이 살아 오면서 창안해 낸 최고의 걸작품은 영원과 순환을 시간으로 표현한 것이라 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일초 일분 한 시간 하루를 분할하여 의미를 부여하면서 그 운행에 맞추어 살아간다. 하루를 일곱번 모으면 일주일이 되고, 서른번을 모으면 한 달 이라고 한다. 한 달이 열 두번 쌓이면 일년이 된다.

 이러한 시간의 흐름을 ‘유수같은 세월’ 이라고 표현한 선인들의 비유는 탁월하다. 물은 발원지에서 샘 솟아 계곡을 돌고 돌아 강에 이르고, 강물은 청산을 굽이 굽이 흘러 드넓은 바다에 이르면 그 흐름은 정지되고 만다. 인생도 이와같은 이치로 살아간다. 이승에서의 아웅다웅 다투며 살아 가던 생애는 강물의 흐름 같은 것일 뿐. 저승은 바다처럼 넓은 영원한 안식처이기에 <돌아 가셨다.>고 하는 것이다.

  성산일출봉에서 어둠을 불사르며 힘차게 솟아 오른 갑신년의 태양은, 사라봉 서녘 바다를 황금으로 물들이며 사라질 준비를 하고 있다. 사랑도 미움도 때가 되면 닫아 걸게 마련이듯이 마지막 장엄한 모습을 유산으로 남기며 바다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올 해는 참으로 소란스러운 한 해였다. 여의도 정치판은 세모에서도 시끄럽다. 추락을 거듭하는 경제는 회생의 날개를 펴고 높이 비상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못살키여, 죽어지키여, 어떵살코, ‥‥ 서민들의 근심 걱정이 산처럼 쌓여 가고 있다. 어디 그 뿐이랴. 수구 꼴통이니, 좌파적 진보니 하는 이념 논쟁도 고압선이 합선된 것처럼 불꽃을 튕긴 해였다. 그 중심에는 오직 나만이 있고, 나의 이익만이 정당하고, 다른 신념은 모두 나의 신념의 적이 되는 증오가 세상의 힘으로 행사 되었다. 이런 시대에 스스로가 누구의 진지한 이웃이 되어 본 적이 있는가. 누구의 진실에 다가선 적이 있는가, 모두가 자문자답 해 볼 일이다.

  세상은 어두어 가고, 주위는 거칠어지며 영적 경험들은 얕아져서 우리의 삶이 메말라 간다 싶을 때는 내면세계가 없는 공허를 느끼게 된다. 사람들의 일생은 영원한 시간에 비추어 찰나의 순간에 불과한데, 가치 지향이 없는 시간이 이어진다면 그것은 회복할 수 없는 삶의 낭비가 아닌가. 그러나 한 해가 저문다고 낙망할 일은 아니다.

어린 아이의 울음 소리가 그 자체로서 아름답고 귀중한 것처럼, 새해 아침에 솟아 오르는 태양도 그 자체로서 경건하고 의미있는 것이 아닌가. 닭 울음 소리로 열릴 을유년 새해를 맞을 준비를 하자. 우선 마음의 목욕부터 하자. 소란스러움 속에 살아 오면서 낀 마음의 때를 정갈하게 씻어 내자. 게심다리도, 몽리다리도, 밀세다리도, 광질다리도 마음을 딲아 내고 새로운 출발을 하자.

새해에는 서로가 소통하면서 살아가자. 핸드폰과 전화, 인터넷 등 소통의 수단들은 누부시게 발달하였건만, 사람들은 마음의 문을 걸어 닫고, 귀를 막아버리고, 입을 봉해 버리니 불통의 사회가 될 수 밖에 없다. 낙조의 빈터에 밝은 해야 솟아라. 이글 이글 타는 얼굴 희망으로 솟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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