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생각] 윤원구 교장을 기억하자
[나의 생각] 윤원구 교장을 기억하자
  • 제주타임스
  • 승인 2010.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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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고등학교는 1907년 7월 1일 개교한 사립제주의신학교에서 시작되었다. 의신학교는 관청의 재정적 지원 없이 지역 유지들과 주민들의 의연금으로만 세운 사립학교로, 풍전등화의 대한제국 말에 제주지역에 피어난 고등학교 수준의 유일한 인재양성기관이었다. 당시 제주군수 윤원구(尹元求 1839~1910)가 바로 이 의신학교를 설립한 교장이었으니, 제주고의 초대교장이다.

윤원구는 대한제국 광무10년(1906, 고종 43년) 9월 29일 군수직을 발령 받아 10월 20일 도임하여 2년여를 재직하다가 융희 2년(1908, 순종 2년) 12월 10일 제주군수직과 교장직을 칭병(稱病) 사임하고 제주를 떠났다. 이 기간 동안 그는 공립제주보통학교를 설립한 후, 의신학교 설립을 구상했고 민의를 수렴하여 마침내 설립의 소망을 이루었고 이 두 학교의 교장직도 겸직했다.

의신학교는 1907년 4월 1일 학부 인가를 받아 이 해 7월 1일 윤원구 교장의 확고한 설립취지와 이념을 바탕으로 먼 미래를 내다보며 개교한 중등학교였다. 윤 교장은 『사립제주의신학교기본금연의문』에서 “학교라는 것은 오직 나라의 기초요, 백성을 가르치는 근본이다. 나라의 흥폐와 백성의 문명함과 야만스러움이 오로지 교육 하나에 달려있다(學校者는 維國之基礎요 敎民之根本也라 國家興廢와 人民文野가 專在於敎育一事하니...)”고 의신학교의 건학이념과 그 설립과정을 밝혔다. 요컨대 ‘나라를 부흥시키고 백성들을 문명화’하자는 것으로, 그 가치를 ‘흥국문민(興國文民)’으로 요약할 수가 있을 것이다.

윤원구 교장은 견문이 넓고 박식하면서도 기개가 활달 강직했고, 민족개혁에 대한 의식이 확고했다. 선견지명이 있어 근대 신학문 교육과 애국계몽운동에 전력을 다했다. 그는 군수 재임 중 당시 폐해가 많은 각종 낡은 제도를 허물고, 지역실정에 맞지 않은 각종 징세를 개선하도록 중앙에 건의하는 한편, 수시로 시국관련 강화(講話)를 통하여 주민들을 계몽했다. 신기술 신지식 보급을 위하여 사립제주의신학교 외에 양잠학교와 일어학교도 설립했다. 양잠회사와 일반 상업회사의 상공활동을 지원하고, 오일시장을 개설하는 등 근대 개화정책을 적극 추진함으로써 주민들의 칭송을 받았다.

윤원구 교장의 본관은 해평(海平)이고 순종황제의 계비 순정효(純貞孝) 황후와 애국가를 작사한 윤치호 등과 같은 가문이다. 그는 출사가 늦어 51세(고종27년, 1890)에야 무과로 급제하여 이듬해 7월 궁내부 외사과 주사(판임관 7등)로 관직에 들어갔다. 광무10년 8월 2일 동래군수로 임명되었다가 9월 29일에 외직인 제주군수로 전보되었으니, 당시 윤 군수의 직급은 군수 중 최고위급인 주임관 2등이었다. 아울러 그는 광무 10년(1906, 고종 43년) 11월7일 제주재판소 판사도 겸임했다.

융희 2년(1908, 순종2년) 7월 윤원구 교장이 고승천 등에게 “제주도가 일본인들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다”면서 자극한 것이 계기가 되어 고승천 등이 주도한 의병운동(1909)이 일어났다고 한다. 또 재임 중 면관 대상자로 보고되기도 했고, 양승지(梁勝祉) 등 일부 주민들의 고변으로 조사도 받았으나, 제주군수 퇴임 후 한때 제주도 관찰사의 물망에 오르기도 했다.

그가 떠난 후 의신학교는 1909년 12월 22일 공립으로 개편하는 인가를 받아 1910년 4월 1일 공립제주농림학교로서 신학년도를 개시했다. 이번 7월1일자로 제주고가 공립으로 시작한지는 100년이 되지만, 그 연면한 일직선상의 학교사로 보면 사실은 개교 103년이다. 제주 현대사에 있어 윤원구 교장은 길이 기억될 인물이었다. 최근에야 그의 행적과 몰년월일이 상세히 밝혀져 무척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

김  순  택
세종의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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