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도 커닝이 있었을까.
대답은 '물론'이다.
붓으로 글씨를 쓰던 시절, 이른바 '커닝페이퍼'를 만드는 작업 자체가 힘들었을 것으로 여겨지던 시절에도 신분상승을 도모하기 위한 '커닝'이 있었다.
그 수법을 보면 시험장에 반드시 휴대해야 하는 붓 대롱 속에다 예상답안지를 말아 넣고 훔쳐보는 방법이다.
요즘과 비슷하지만 문제예측이 틀렸을 경우 허사가 된고 만다는 단점이 있다.
똑같은 수법으로 예상답안을 콧구멍에 말아 기우는 사례도 있었다고 전한다.
합격자의 답안지에 자신의 이름을 바꿔 붙이는 대담무쌍한 수험생도 있었다고 한다.
남의 답안지를 베끼거나 다른 사람이 대신 시험치는 방법매에 들어갈 정도의 작은 책을 만들어 몰래 꺼내 보는 방법. 손가락 길이 만한 천 여개의 대나무 살에 경서의 첫 구절을 적어놓고 평소에는 암기용으로 사용하다 과거 볼 때는 커닝 페이퍼로 전용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감독관들은 어떻게 대응했을까.
조선시대에는 시험감독관이 열 개의 도장을 가지고 다니면서 그 수법에 따라 도장을 골라 시험지에 찍었다.
남의 답안지를 보면 눈알을 굴린다는 뜻의 '고반'이라는 도장을, 시험지를 바꾸면 '환관'을 누른다.
문장의 초를 잡는 초지를 이용하면 '낙지'가 찍히고 자리를 옮겨 앉거나 허락 없이 자리를 뜨면 '이석'도장을 받게 된다.
감독관의 지시를 따르지 않으면 '항거'라는 도장이 가중됐다는 것이다.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는 시제를 미리 알아내서 이미 지어진 문장을 외우거나 사진첨부가 없던 시절 대리인이 응시하기도 했다.
권력이 있거나 부를 소유한 가문에서나 가능했을 만한 수법이다.
최근 휴대폰을 이용한 대학수학능력시험 커닝 사건이 나라전체를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최고 지배층인 관료가 되기 위해 그랬다지만 우리의 아이들은 왜 그랬을까.
좋은 대학을 나와야 입사시켜주고 대우해주는 사회가 공범이다.
그리고 어렸을 적부터 '남과 경쟁해서 이겨야 성공한다'고 가르친 우리들 또한 공범이다.
커닝에 참가한 몇 몇 아이들을 벌준다고 없어질 문제가 아니라는 판단에서 씁쓸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