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꾸 잠이 깬다. 저녁에 마신 커피 때문인 줄 알았다. 아니다. 어저께 신문기사 내용 때문이다. 우리나라가 OECD국가 중에서 자살순위 제1위이며, 탤런트 고 최진실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지 1년 6개 월 만에 그의 동생 최진영씨도 자살 했다는 기사다. 이 기사를 읽고 커피를 마신 것뿐인데 잠자리가 순조롭지 못했다.
OECD국가의 국민 10만 명당 자살사망자 통계에서 우리나라는 24,3명, 헝가리는 21명, 일본은 19.4명, 핀란드는 16.7명.....순이다. 우리나라는 하루 평균35명이 자살하고 1년에 1만3000명 정도가 자살한다고 한다. 보통사람이 자살하면 주변사람 수십 명 정도가 충격을 받는다. 많으면 수 백 명이다. 이보다 연예인의 자살은 국민 수 천명이상이 충격을 받는 것이다.<자살심리학> 연예인의 자살은 유행되어 동조자살(copy suicide)이라는 집단자살 (mass suicide)이 나타난다고 한다.<베르테르 effect이론>
자살은 갑자기 존재에서 무(無)로 사라지는 사건이다. 우리가 그토록 붙잡고 싶어 하는 돈과 인기를 이미 손에 넣었던 존재가 한 순간에 무(無)로 사라져 버리는 순간이다. 돈과 인기도 ‘절대무(絶大無)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것인가?
학문 이론에 따르면 인간은 죽음에 대한 공포보다도 생존에 대한 고통이 조금이라도 더 커지는 바로 그 순간에 자살 한다고 한다. 평소에는 죽음의 공포가 생존의 고통보다 훨씬 크다. 그래서 자살은 예방되고 사회는 유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 어느 지점에 다다르면 삶의 고통이 죽음의 공포를 추월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이게 우울증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신경성으로 외톨이 생활하게 되고, 더 나아가서는 정신적 사이코패스(psycho path) 시발점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죽음에 대한 공포는 근원적 공포다.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저절로 가지게 되는 공포다. 이공포를 최대한 피하고 싶은 것이 생의 원천이고 인간의 본능이라고 한다.
그런데 자살은 이 본능적 공포에 스스로 자초해서 뛰어드는 행위이다. 삶의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 이 사대육신(四大肉身)하나 건사하는 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으면 스스로 목숨을 끊겠는가?
생존은 고통이다. 생존에 따르는 고통은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KBS동물의 왕국에서 보면 화면에 등장하는 모든 생물과 동물은 예외 없이 생존의 고통을 짊어지고 살고 있다. 한 시간도 긴장을 풀 수가 없다.
먹이사슬의 정상에 있는 사자도 여차하면 사냥에 실패해서 배를 곯는다.
하이에나는 끊임없이 암사자가 잡아놓은 먹이를 뺏어 먹기 위해 사력을 다하면서 산다. 치타는 자기가 잡은 먹이를 표범이나 하이에나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먹이를 나무위로 끊고 간다.
아프리카 영양은 끊임없이 초원을 뛰어 다녀야 한다. 조금만 방심해도 차타나 사자의 이빨에 목털미를 물린다. 누우 떼는 강을 건너다가 운이 없으면 악어에게 잡혀 먹이가 되어야 한다. 동물의 세계에서는 끊임없이 먹고 먹히는 과정이 계속 된다. 잠시도 쉬는 법이 없다. 이게 생의 섭리인지도 모른다.
말은 못하지만 동물들도 삶의 반대급부로 엄청난 스트레스와 고통부담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동물의 세계에서는 자살은 거의 없다. 우리들은 동물의 세계에서 삶의 법칙을 배워야 한 다. 잡혀 먹힐 때 잡혀 먹히더라도 미리 죽지 않는 강인한 생존의지를 배워야 할 것 같다.
이와 같은 강인한 생존 의지와 더불어 자신의 감성을 키워야 한다. 자신의 감성을 키우기 위해서는 자신의 처한 이야기 즉 ‘내이야기’를 해야 한다. 내 일상의 기쁨, 슬픔을 이야기 하며 삶의 고통을 녹여야 한다. 내 아내와 아이들, 부모, 가족들에 대한 가슴에 담아둔 이야기를 사랑하는 이와 울고 웃으며 가슴에 고인 한을 털어 내어야한다. 이것은 억장이 무너지는 고통을 같이 공유하는 상호작용의 맥락에서 내 진정한 생의 존재는 혼자가 아니라 단체경기의 일원으로 확인되는 것이다.
오늘 힘들다고, 외롭다고, 괴롭다고 삶을 포기한다면 그 책임은 누가 져야하며 또한 남아서 힘들게 보내는 가족은 어떻게 되겠는가? 이 세상에서 나를 위해 기도해 줄 누구 한사람이라도 있다면 살아갈 이유는 분명한 것이다. 삶에는 행복과 불행, 희망과 절망, 비상과 추락, 의지와 좌절 같은 것은 언제나 나타났다 사라지고, 치밀었다 가라앉고, 밀러왔다 밀려가는 하얀 파도와 같은 것이 아닐까? 삶은 파도같이 신선하고 싱그러운 생의 흐름이라고 속절없는 생각을 해 본다.
김 찬 집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