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랑은 한국의 대표적 민요의 하나이다. <아리랑>이라는 후렴이 들어 있는 구전민요이다. 민중생활의 순간순간의 비애와 애환을 반영하고 있으며, 조선 말기 이후부터 일제강점기에는 제국주의에 항거하여 민족적 감정과 울분을 호소하고 민족적 동질성을 강조하는 근대 민요의 역할을 하였다. 아리랑을 지방에 따라 구분하면《경기아리랑》,《강원아리랑》,《정선(旌善)아리랑》.《춘천(春川)아리랑》,《밀양(密陽)아리랑》,《진도(珍島)아리랑》 등이 있다. 최근에는 해외에 거주하는 교포들이 지어 부르는 교포아리랑도 있는데 《독립군아리랑》 《연변(延邊)아리랑》이 그 예이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밤 하늘 별처럼 생활에는 고통이 많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황혼 때까지/ 이별을 아쉬어하면서 시간을 보내자” 일본 아카섬에는 아리랑 고개가 있다. 왜 일본인들은 하필 아리랑 고개라 했을까?
일본강점기 시절, 특공대원들이 아카섬에 도착해서 1주일쯤 지났을 때 7명의 조선인 위안부도 섬에 잡혀왔다. 7명의 위안부 중 가장 나이어린 여자는 코마치, 18살이었다. 그리고 코하루와 미하루는 20살, 아케미가 23살, 시노부가 25살, 가장 나이가 많은 코하나는 30살 정도 됐을까? 그들이 아카섬에 있던 기간은 3개월여에 불과하다. 1945년 2월 27일, 해상전진기지 제2대대 독립대대가, 오키나와로 이동했을 때 7명의 여자들도 같이 끌려갔다.
이들 위안부와 성적인 관계를 가질 수 있던 사람은 장교와 하사관에게 한정되어 있었다. 위안부를 둘 때 섬사람들이 반대가 있었지만 “그러면 섬의 아가씨들이 강간당하게 된다”고 협박했다. 특공대원들은 무거운 배터리를 지고 고개를 넘었으며, 휴식시간에는 조선출신의 대원한테서 ‘아리랑’ 노래를 함께 불렀다. 그래서 이 고개를 ‘아리랑 고개’라 부르게 되었다. 장교의 인솔이 없을 때 불러진 노래이다.
또 있다. 오키나와에서 처음으로 조선인 위안부의 존재가 밝혀지면서 패전 후, 오키니와가 1972년에 본토에 복귀함으로써 배봉기라는 한국인이 불법체류자가 되어 강제송환의 대상이 되었다. 배봉기씨는 강제송환을 두려워하고 특별재류 허가를 신청했기 때문에 위안부로 조선에서 강제적으로 연행 당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그러나 위안부 문제가 사회적 이슈가 된 것은 1990년대이며 배봉기씨가 1991년 77살로 돌아간 후였다.
“매미가 울어 호박이 꽃이 피는/ 나의 고향/ 아름답고 순정한 사랑스러운 아가씨는/ 열무 오이김치/ 절임 잘하고 요리 잘하고/ 꼼꼼하게 일하고 기량이 좋다/ 언젠가 사내아이도 여자이이도 주시겠지요/ 사랑스러운 아가끼”
노래가사는 평온한 가정에서 검소하게 사는 여자의 모습이다. 배봉기씨는 수십 년 만에 일본 토카키시섬 항구주변을 찾았지만 옛 풍경은 찾아낼 수가 없었다. 항구 주변을 한 바퀴 돌아 숙소로 돌아가려고 했을 때, 걸음을 멈추었다. 배봉기씨의 시선은 숨 그늘의 시냇물에 멈추었다. 그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는 세탁물을 냇물에 헹구면서 자주 노래를 불렀다. 그는 한곡을 또 뽑았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 가서 발병난다”
올 3월 25일부터 26일까지 일본 오키나와현 좌마미촌에서는 ‘오카나와전 65년-3.26 아카섬 평화제’가 열린다. 첫째 날 아카섬 아리랑 평화제에서는 제주에서 건너간 제주명창 안복자씨가 아리랑 메들리를 부르고, 둘째 날 합동위령제에서는 백록민속예술단 한춘자씨가 무속 춤으로, 최길복씨가 살풀이로 관중들 앞에 선다. 이 행사는 1945년 3월 26일 8시4분 미군이 아카섬에 상륙해서 오키나와전이 시작된 날을 기념하여 올해 처음 시작하는 행사이다. 특히 이 행사는 일본에 있는 제주4·3을 생각하는 모임 ‘한라산회’ 고문이신 나가다 이사무 JR서일본노동조합중앙본부 특별집행위원의 역할이 컸다. 나가다 집행위원은 작년부터 제주4·3희생자유족회와 관계를 맺고 있으며 제주4·3위령제에도 참석하고 있다.
김 관 후
시인/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