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경남 통영에 재통영제주우도면 신년하례에 참석을 했다. 우도를 떠나 고향 사람들 끼리 친목을 돈독이며 살아가고 있었다. 일년에 한번 고향의 몇몇 지역지도자를 초대 우의를 도모하고 고향 발전에 보탬이 되고자 창립한 우도사람들의 모임이었다.
백 여 세대에 이백 여 명의 우도 사람들이 오순도순 서로 의지하고 살아가고 있었다. 길게는 반세기 짧게는 이십 여 년, 보릿고개 시절 먹고 살기위해 고향을 떠나 남몰래 고향을 그리며 살아온 낯익은 해녀들이었다.
자식들 다 키워놓은 것은 얼굴 주름살이 세월의 무상함을 알 수 있었다. 우리 일행을 반가이 맞아주는 따뜻함은 고향의 그리움을 보는 것 같았다. 고향이란 말만 들어도 마음 설레는 모습 들이었다
통영(충무)은 당시 교육, 관광, 문화생활이 용이한 도심권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오랜 세월 그곳에서 정착하고 산 것은 배운 것이 물질이기에 돈벌고 먹고 살기 위해서다. 고향에 부모 형제들을 위한 희생양들이다.
해녀 생활로 살아감은 여느 곳이나 매 일반이지만 다수의 우도해녀들이 집성을 이루고 살아가는 유일한 곳이다. 지금에 이루기까지 지역사람들의 텃세와 괄시로 서러움도 많이 받았다면서 지난 일들을 회고 하며 눈시울 붉히곤 했다. 그럴 때 마다 고향 생각에 더 마음이 아렸다는 말에 우리의 다문화 의미를 곱씹게 했다.
머지않아 사라질 제주 해녀들의 숨비소리, 치열한 삶과 생존을 위해 절박한 현실 속에 가족위해 굳세게 살아온 억척스러운 제주 해녀의 여성상이다. 물질이 천직인양 사시사철 비가 오나 눈이오나 언 몸 녹여가며 바다 밭을 일구며 살아온 제주의 어머니들, 오죽했으면 고향을 떠나 낯선 타향에서 살겠느냐면서 녹록치 못한 생활 끼니걱정을 하시는 부모님을 보며 안쓰러운 시절이었다면서 눈물 글썽이는 모습에 마음이 뭉클 했다. 누구에겐가 붙잡고 그동안에 고행의 한을 풀고 싶어 하는 애잔한 모습에 마음이 짠 하곤 했다.
반나절이면 오갈 수 있는 교통수단, 길을 걷다가도 안부를 묻고자 할 때 통화 할 수 있는 통신임에도 고향이 타향이 되어버린 삶을 살아야 하는 아린가슴, 기다렸다는 듯 고향사람이라니 덮 버선에 단숨에 달려와 이산가족 만남을 연상케 했다. 이를 두고 지란지교라 했든가 서로 떨어져 있어도 마음이 통하고 함께 있으면 편하고 포근한 고향사람들, 다 변한다 해도 변하지 않은 고향의 마음이었다.
이제 자식들이 터줏대감으로 각 분야에서 자기 몫을 하는 모습도 존경스러웠고 자영업으로 의젓한 간판을 내걸고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은 참으로 보기가 좋아 보였다.
어렸을 적 밥 한 번 배불리 먹어 보는 게 소원이었던 시절을 생각하며 가져온 음식을 먹고 먹여주는 정겨움이 지난 세월을 반증하는 것 같았다.
일상의 자기 생활을 뒤로 한 채 고향에서 간다니 먼 길 마다않고 공항 까지 손수 차를 몰고 왕래 해 주신데 진심으로 감사 할 따름이다.
올 소라축제(4. 16. - 4. 18.)때 고향을 찾아 배고프던 소싯적 추억을 생각하며 당시 코흘리개들과 정겨운 담소도 나누고 올레 길도 걸으며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 고향의 봄 향기를 만끽하길 기대해 본다.
강 영 수
제주시 우도면 조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