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폭력도 정당화 안돼
‘재판은 변명하지 않는다. 판결로만 말할 뿐이다’. 최근의 사법개혁 논란에 접하면서 생각나는 법언(法諺)이다.
소위 ‘강기갑 무죄’, ‘PD수첩 무죄’ 판결로 야기되는 소모적 논쟁에 대한 법조(法曹)의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해서다.
결론을 말하면 이들 사건 판결과 관련한 일부 보수단체와 보수 정당의 일방적 사법부 공격이 반문명적이고 비민주적이기 때문이다. 도가 지나쳐 집단 발작 수준이다.
관련사건 1심 판결 후 보수단체 회원들은 출근길 사법부 수장의 차량에 계란을 투척하는 등 부적절한 물리력을 행사했다. 백주 테러 수준이었다.
판결했던 판사들은 신변에 위험을 느껴 집에 들어가지 못하거나 경호에 의지해서 출퇴근 해야 했다.
법원 판결이 마음에 안 든다고 폭력성을 동원하는 것은 사법독립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 아닐 수 없다. 문명사회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야만적 행위이기도 하다.
사법부의 판단은 처한 입장에 따라, 이해(利害)관계에 따라 시비가 엇갈릴 수 있다. 불만도 있을 수가 있다. 그러기에 합리적 논쟁은 필요하다.
입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에 끼어들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으로 폭력을 정당화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아무리 국민의 법감정과 거리가 있고 동기의 순수성을 강조해도 그렇다.
편견 없는 재판이 정의
사법부 독립은 국민의 기본권 수호를 위한 장치다. 판사는 법과 양심에 따라 판결해야 한다는 당위도 여기서 비롯된다.
판사가 이념의 사슬이나 편견의 유혹에서 더욱 자유로워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사람을 미워하지 않고 죄를 벌하는 것이 명재판관’이라는 ‘세네카'의 ’편견배제 원칙'은 그래서 오늘날에도 유효한 진리다.
‘제임스 허킨스 페크’는 1820년대 미 세인트루이스 지방법원 판사였다. 그는 판사로 일했던 14년 동안 재판 때는 언제나 흰 헝겊으로 눈을 가리고 판결했다.
소송당사자들의 얼굴을 보지 않고 편견 없이 재판을 진행하기 위한 조치였다. 판사가 얼마나 치열하게 편견을 다스려야 하는지를 말해주는 예화다.
재판에 편견이 개입되면 이미 그때부터 사법부의 공적정의는 무너질 수밖에 없다. ‘사법부 독립’의 외침도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할 것이다.
재판에서 상급심 제도를 도입한 것도 가급적 편견을 배제하고 사법부의 공의(公義)을 위한 여과장치나 다름없다. 1심의 편견을 2심에서 걸러내고 2심의 오류를 최종심에서 골라내기 위한 조치인 것이다.
이번에 논란이 되고 있는 몇몇 판결들에 대한 시비도 헝클어진 공의에 의한 착종(錯綜)현상 때문이 아니겠는가.
같은 공적정의를 말하면서도 보수가 말하는 공의와 진보가 말하는 공의가 제각각 방향이 달라서 하는 소리다. 사법부 공격 이제는 그만법의 정의나 사법부의 진정한 독립보다는 내 목소리 키우는 데만 열을 올리고 있는 것이다.
사법부 공격, 이제는 그만
계란은 껍질을 깨고 열을 가하면 프라이(fried egg)가 되고 안에서 온기를 보듬어 스스로 껍질을 깨고 나오면 병아리가 되는 것이다.
사법정의도 마찬가지다. 정권이나 정치권이 개입해 개혁을 말하다가는 정권이나 정치권 입맛에 맞는 ‘프라이 사법부’가 되지만 내부에서 치열하게 온기를 품는다면 생명력 있는 사법부 독립이 가능해 진다.
외부의 사법부에 대한 지나친 공격은 그래서 사법부의 독립문제가 아니라 사법부의 존립에 심각한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이번 판결을 명판결이라고 박수 칠 일은 아니다. 몇몇 판결에 대한 시시비비를 끝내자는 것도 아니다.
정치권이나 일부 특정단체가 논평수준을 넘어 의도적으로 이념적 색깔을 덧씌워 공격하고 논란을 확대 재생산하는 것은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관련 사건들에 대한 상급심 재판이 남아 있어서도 그렇다.
사법부도 차제에 재판 형식과 내용에 대한 진지한 자기 검열을 통해 공정재판에 한 걸음 더 다가서는 노력을 보여야 할 것이다.
이와 함께 검찰도 무리한 수사나 공소권 남용이 이번 사태를 부른 것이 아닌가 하는 반성의 바탕위에서 스스로를 돌아볼 일이다.
김 덕 남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