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벌써 열흘이나 훌쩍
‘시계는 열한시 오 십 구분 일분이 지나면 날이 바뀐다 날이 바뀌어본들 별일도 없지만 바뀌는 날에 기대를 걸어본다’ 박남수(朴南秀)의 시 ‘시계는 열한시 오 십 구분’의 전반부다.
그렇게 일분이 지나 새날이 밝았고 그렇게 기대를 걸며 2010년의 새해를 맞았었다.
그런 새 아침과 새해가 벌써 열흘을 훌쩍 넘겨버렸다. 새날의 희망과 다짐을 추슬러 보지도 못했는데 속절없이 시간만 축내 버렸다. 작심삼일(作心三日) 부끄러움에 조바심만 더욱 바쁘다.
그러나 어쩌랴, 바람을 손아귀에 잡아 가두어 둘 수 없듯이 가는 세월 역시 붙들어 맬 수는 없는 노릇이다. 시간은 모든 것을 삼켜버리는 블랙홀이다.
영원히 정복할 수 없는 불가사의(不可思議)인 것이다. 그래서 플라톤은 ‘시간은 미래영겁(未來永劫)의 환영(幻影)’라 했다. 그렇다고 가고 오는 시간에 무심할 수는 없는 일이다.
아무리 붙잡아 둘 수도, 방안에 가두어 두지도 못하는 것이 시간이지만 그것을 이용할 수는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시간은 이용하는 자의 몫이요 자산이다. ‘시간을 얻는 자는 세상을 얻는다’는 말도 시간의 유용성을 강조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현명한 사람의 시간이용
그러기에 잃어버린 시간에 연연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과거의 순간들이 더욱 아쉽고 되돌려 갖고 싶다고 해도 그것은 과거일 뿐이다.
한 순간의 해프닝이거나 에피소드 일 따름이다. ‘시간과 희망은 잠자고 있지 않는 인간의 영원한 꿈’이라고 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랬다. 시간이 있음으로 희망을 엮을 수가 있고, 그것이 언제나 새로운 미래를 꿈꾸는 바탕이 될 수 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그렇다. 어리석은 사람은 지나가버린 시간에 마음을 쓰고 현명한 사람은 현재의 시간을 지혜롭게 이용하는데 마음을 쓴다고 한다. 인생은 짧다. 찰나(刹那)인 것이다.
이런 눈 깜짝 할 찰나의 인생은 시간낭비에 의해 더욱 짧아질 수밖에 없다. 인생이 짧다고 고무줄처럼 잡아당겨 늘릴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시간을 아끼는 지혜를 터득 할 수만 있다면 짧은 인생의 내용은 더욱 감칠맛나고 향기로울 것이다.
잘만 이용하면 시간은 언제나 노력하는 자의 것이다. “시간이 없다”거나 “시간이 짧다”는 것은 시간을 서투르게 쓰는 자의 불평이요 시간을 하릴없이 낭비하는 사람들의 변명에 불과하다. “인생을 사랑한다면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는 플랭클린의 경구는 이들에게 주는 질책이나 다름없다.
내일이 있어 더욱 희망적
그렇다면 우리는 새해 들어 열흘 남짓을 어떻게 보냈을까. 어영부영 보내버린 낭비였을까. 아니면 부단하게 뭔가를 찾고 보람을 엮어냈던 나날이었을까. 사람마다 나름의 평가는 다를 것이다.
매일 매일이 행복한 사람이 있을 것이다. 작지만 기분 좋게 꿈을 일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시간을 지혜롭게 이용하는 사람들이다. 반면 아쉬움에 후회했던 이들도 있을 것이다. 세워놓은 계획들이 첫날부터 삐꺽거릴 수도 있다. 할 일 도 없으면서도 바쁘다는 핑계로 시간을 허비했을 수도 있다.
후회해도 소용이 없다. 그러나 ‘후회한다고 이미 늦은 것은 아니‘라는 희망이 메시지도 있다. 후회한다는 것은 다시 새로운 삶을 살아보겠다는 희망의 표출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항상 후회하며 살 일은 아니다.
후회를 통해 새로운 시작을 하는 것은 한 두 번이면 족하다.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지금은 더 감사하고 더 많이 행복했을 것”이라는 내용의 시는 10대 전문가로 알려진 ’킴벌리 커버거’가 썼다.
후회 없는 삶에 대한 진지한 묵상 내용이다. 아무리 부끄럽고 후회스런 일들이 많았음에도 우리는 설레는 내일이라는 시간이 있음으로 하여 더욱 희망차고 행복할 수가 있는 것이다.
김 덕 남
주필